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 - ilbon-ui sigminjiyeossdeon nala

3. 동아시아인이 받은 피해와 고통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국가자본주의 및 국가체제의 위기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국가체제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군사적 파쇼체제를 수립하고 침략전쟁을 재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1945년 8월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 하였다. 이런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국내뿐만 아니라 침략을 당한 동아시아인들을 철저하게 탄압·지배하는 동시에 인력 및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탈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런 수탈을 극대화 하기 위해 동아시아인들을 일상생활과 함께 의식세계까지도 통제하고자 하였다. [주847]

이런 배경에서 대외 침략전쟁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내 뿐 아니라 점령지의 민중의 저항을 철저히 탄압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 행위 과정에서 피침략자에 대한 탄압과 잔학 및 학살 행위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전쟁의 일반 속성으로 돌리거나 우발적·부분적인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이 동아시아인에게 준 상처와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성격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37년 12월부터 거의 2개월에 걸쳐 일어난 ‘남경대학살사건’ 이었다. [주848]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반년 만에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이 함락되었다. 난징을 점령하면 국민당정부가 항복할 줄로 일본은 판단했으나 예상외로 이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이 선택한 대응이 집단적 학살이었다. 일본군은 전쟁 중 시내로 피난 온 사람과 도시 주변의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무참하게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학살의 방법은 기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당시 일본국내에서는이 사실이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외국인 생존자들에 의해 세계에 보도되고 몇 가지 르포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 동경재판에 따르면, 당시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 간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 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물론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 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민족적 특성을 말살하려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경찰과 군사력에 의한 물리적 억압만으로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은 식민지인들의 의식세계까지 일본인화(日本人化)시키려 하였다. 이를 통해 식민통치의 영구적 안정을 도모하여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주849]

이같은 강력한 동화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1930년대에 들어서 침략전쟁을 전개하고, 이를 더 한층 강화시킨 ‘황국신민화정책’ (皇國臣民化政策)을 실시하였다. [주850]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1937년 8월 중국과의 전면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의 지지와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국민정신 결집을 목표로 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실시요강’ 을 발표하였다. 이어 9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주851]

이 법은 1938년 5월부터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 였던 조선과 타이완에서 전면 실시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전쟁협력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관제운동으로,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신국(神國) 일본, 그리고 국가주의 및 보국, 일본정신 등이 강조되었다. 이 운동은 뒤에 금품헌납, 국채응모, 저축장려, 물자절약, 근로봉사 등의 국민의 일상생활 전반을 제한하는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군인과 우익의 주도로 전개된 이 운동은 동아시아인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몰았다.
조선과 타이완 식민지에서는 애국일 설정과 신사참배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그리고 창씨개명 등을 통해 식민지인들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려고 하였다. 교육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차원에서 일본어만 배우고 일본어로만 말하게 했다. [주852]

일본의 침략 확대로 본토와 동남아시아 각지, 태평양 상의 도서 지역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강제 징용과 강제 연행이 실시되었다. [주853]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전세의 악화에 따라 부족한 인력과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한 식민지 동원 수탈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이런 전시 체제하에서 경제적 자원수탈과 함께 희생을 강요한 것이 인력수탈이었다. 그들은 전선의 확대에 따라 병력과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 국민징용령, 학도 전시동원체제 확립 요강, 해군특별지원병령, 유군 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 등을 공포하였다. 급기야는 ‘여자정신근무령’ 을 공포하여 여성인력까지 전쟁에 동원하였다. [주854]

동원된 여성들은 전시물자 제조 공장의 노동자나 전선의 군위안부로 투입됨으로써 엄청난 비인도적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했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위해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모든 산업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도록하고 식량은 물론 생활필수품까지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미곡공출을 강요하거나 각종 지하자원과 광물자원도 수탈의 대상이 되어 전쟁물자 생산에 투입되었으며, 모든 금속류를 공출하도록 하여 생활금속, 집기 등을 강제 공출하였다. 심지어는 사찰의 범종이나 교회의 종·철탑·울타리까지 수탈하여 전쟁물자로 동원하였다. [주855]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다르게 한국을 대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슷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주변국을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는 독일과 비교해보면 일본의 자세는 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 서구 국가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면서, 피해 당사자인 한국과 중국에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한다.

이런 일본의 모순적인 태도 이면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 사업이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을 대륙에서 내려온 천손민족이라고 자처해왔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곧 자신들의 ‘고향’을 식민지로 만든 셈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넘어 만주를 거쳐 중국을 침략하면서 일본민족의 북방기원설로 이를 정당화해왔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고향이자 동시에 열등한 식민통치의 대상으로 봤다. 지난 100여년에 얽힌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관은 이런 자기모순적 역사관의 산물이다.

고인돌에 묻힌 일본의 ‘인디애나 존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배경인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가 경쟁적으로 세계 각국의 문화재를 약탈하던 시기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그런 제국주의 고고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일본은 한국을 정식으로 침탈하기 훨씬 전인 1899년부터 한국의 문화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원래 일본의 한반도 조사 목적은 일본인의 기원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학자가 도쿄대 인류학교실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1870~1953)다. 일본에서도 시골이었던 시코쿠 도쿠시마현 출신인 그는 정규 학교를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대 인류학교실의 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일본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데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그는 청일전쟁의 전쟁터였던 랴오둥반도를 비롯하여 대만, 오키나와,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사방으로 무자비하게 진출하던 일본군을 따라다녔다. 도리이는 각 지역의 원주민을 조사하여 열등한 집단과 우월한 집단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대륙을 건너온 일본인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 일본이 섬을 벗어나 대륙 각지를 차지하는 데에 국민적인 흥분이 고조됐던 당시였기에 그의 자료는 크게 주목받았다. 도리이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1910년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총독을 만나서 한국에서 일본민족의 기원을 찾는 조사를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6년에 걸친 한반도 조사가 이렇게 시작됐다.

그가 한국에서 주목한 것은 함경도 지역의 석기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 고인돌이었다. 함경도 석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한국에서 살던 ‘미개한’ 토착 한국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반면 고인돌에 주목한 이유는 미개한 토착 한국인들 사이에 살았던 ‘위대한’ 일본인의 조상을 발견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도리이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유사한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미개한 토착 한국인과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한반도의 고인돌이 일본 규슈 일대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고인돌을 추적하면 위대한 일본인의 루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헌병들과 함께 랴오둥반도의 유적을 조사하는 도리이 류조(오른쪽). 강인욱 제공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한국을 조사하기 위하여 온 도리이 류조(서 있는 사람)와 그 일행. 뒤에 있는 건물은 경복궁 근정전이다. 강인욱 제공

도리이의 생각에선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이 잘 드러난다. 원래 서구에서 식민지는 머나먼 아프리카나 근동지역에서 문명의 개화가 아주 늦은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역사를 함께한 이웃이었고, 무엇보다 일본 원주민보다 우월한 일본인들의 기원으로 생각한 곳이었다. 그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으로는 이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합리화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도리이 이후에 조선총독부는 북한의 낙랑군과 남한의 임나일본부를 강조함으로써 원래 한국인은 미개했고, 그들 사이로 일본민족의 기원이 된 이들이 지나갔다는 식의 억지 해석을 했다. 지금도 혐한세력이 한국을 얼토당토않게 비하하는 논리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자로서 도리이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일본 군국주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때, 도리이는 ‘시베리아 출병은 인류학, 인종학 및 고고학에 대한 귀중한 기여다!’라며 감격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도리이는 제국주의의 어용 인류학자로 낙인찍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대륙의 꿈을 잊으려 하지 않은 그는 자신을 고향 도쿠시마에 북방식 고인돌 형태로 무덤을 만들어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는 일본민족의 기원이 북방에 있다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 그의 고향 도쿠시마에 북방식 고인돌 형태로 만들어진 무덤에 묻혔다. 강인욱 제공

한동안 금기시되었던 그의 이름은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부활했다. 그의 이름이 사방에서 언급되고, 심지어 ‘도리이학’(鳥居學)이라고 그의 연구를 신격화하며 따르는 연구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에도 도리이의 자료를 귀중한 자료라면서 분석을 하려는 시도가 있다. 물론 그가 남긴 사진과 다른 여러 자료의 학술적인 의미를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자료에 대한 평가 이전에 이웃나라를 ‘미개인’, ‘변방’으로 매도하며 제국주의적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점에 대한 엄중한 평가는 필요하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에 가담한 학자는 도리이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학자적 역량이나 자료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들을 합리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한국과 만주에서 활동했던 모든 일본 어용학자들은 예외 없이 가치중립을 내세웠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일본의 한반도 인식의 근원

일제는 1920년대부터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와 중국 일대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했다. 바로 금석병용기와 북방문화론이 등장한 것이다.

금석병용기라는 용어는 원래 유럽과 유라시아 고고학의 용어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존재했던 시대를 말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 용어를 한반도에 도입하면서 한국인은 제대로 된 청동기나 철기를 쓰지 못한 열등한 인종이라는 뜻으로 곡해해서 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문화에 머문 토착 한국인 집단과 민무늬토기의 청동기문화로 앞서나간 일본민족이 한데 섞여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금석병용기설에 따르면 한반도의 발달한 모든 유물은 북쪽에선 중국 식민지인 낙랑, 남쪽에선 일본 식민지인 임나일본부의 영향이 미쳐서야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일제 고고학자들도 이미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서로 다른 시대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본 안에서도 신석기시대인 조몬시대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만들어낸 야요이문화가 서로 시기를 달리하며 존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가 짜놓은 금석병용기라는 틀은 해방 이후에도 30여년간 지속하였고, 한국 문화의 자체적인 발전을 부정하는 타율성과 정체성론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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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일본인들이 일본 원주민인 ‘고로봇쿠루’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 일본인은 자신들을 천손민족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원주민을 미개한 모습으로 그렸다. 강인욱 제공

또 다른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의 관점인 북방문화론은 일본인의 기원을 한반도를 넘어 북방 만주라고 보는 이론이다. 이런 일본인들의 태세 전환은 1920년대부터 노골화된 만주와 중국 침략과 관련이 있다. 자신들이 침략해야 할 땅은 원래 일본인의 기원지이기 때문에 침략이 아니라 고토 회복이라는 억지 논리였다. 이 설은 북방 유라시아의 우월한 기마민족들은 말 타고 일본열도로 내려와 고훈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마민족설로 정리할 수 있다. 현지인은 미개화시키면서, 그들 사이엔 위대한 일본인의 조상이 있다는 논리는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는 원래 우리의 영토’였다며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떠도는데, 사실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하던 침략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일본은 자신들의 이웃을 때로는 변방으로 때로는 기원지로 보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최근까지도 나타나는 주변 국가를 필요 이상으로 비하하는 발언의 배경에는 자신의 수천년 이웃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던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가 있다. 이런 일본의 자기모순적 역사관이 오늘날 주변 국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로 나타난 것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