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작가 해명 - gwimyeol-ui kalnal jagga haemyeong

귀멸의 칼날 작가 해명 - gwimyeol-ui kalnal jagga haemyeong

1.

『귀멸의 칼날』에 대한 몇몇 비평을 읽다보면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

이상할 정도로 키부츠지 무잔과 오니들이 은유하는 바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거나, 얼버무린다는 점이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 극우 애니메이션"이라는 틀을 미리 만들어놓고, 이 틀에 비평을 억지로 짜맞추려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무잔은 주인공 탄지로 앞에서 "자신을 그저 자연현상"으로 취급하라며,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귀살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 태도, 무잔과 오니를 단순히 귀살대가 맞서야 할 장치 정도로만 취급하는 "『귀멸의 칼날』 우익론"과 꽤 닮아 있지 않은가.

혹자는 귀살대를 일본 제국의 은유로, 귀살대원들을 국가를 위해 옥쇄하는 일본군인으로 은유하며 비평의 가닥을 잡는다.

그러나 이는 앞서 말했듯이 "『귀멸의 칼날』 우익론"이라는 틀에 억지로 끼워맞춘 주장이 아닌가 싶다. 작중 내용으로도 그렇지만 귀살대는 일본 제국이라는 집단과 가장 성격적으로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비평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끼워 맞추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헤이안 시대 귀족으로 태어나 다이쇼 시대까지 살아 있는 무잔은 '만세 일계'를 은유한다.

무잔을 중심으로 하는 오니들의 숭배는 '천황제 파시즘'을 은유한다. 무잔의 뜻에 따라 생사여탈이 결정되는 오니들의 위계 시스템은, 지역별 토속 신앙이었던 신사들을 하나로 묶은 '국가신토'를 은유한다.

최종국면에서 결국 인간으로 돌아오는 무잔은 쇼와 천황의 '인간 선언'을 은유하며, 무잔과 상현 중 두 명의 추한 기원과 몰락은, 온갖 고결한 척 하던 자들이 결국 사악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드러낸다.

즉, 이에 맞서 '개인'의 삶을 가치를 내세우는 귀살대는 그 자체로 전체주의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며, 또한 천황제에 대한 항거를 은유한다. 마침내 천황은 추한 인간이었음을 고백하고 몰락하며, 임무를 다한 귀살대도 흩어져 '평범한 개인의 삶(환생을 통해)'을 영위하는 것이다.

즉, 『귀멸의 칼날』은 좌익 애니매이션이다.

...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

결국 돌이켜보면 "『귀멸의 칼날』 우익론"은 비평의 여러 방법 중에서 역사전기 비평이라는 단 한 가지 방법만을 맹신한 결과다.

이는 일본의 역사(정확하게는 주워들은 역사), 작가의 성향에만 의존한 비평, 영양가 없는 비평을 내놓는다. 결국 이런 비평의 결론은 "『귀멸의 칼날』 좋아하는 사람은 역사의식도 없고 우익 사상에 찌든 사람"이라는 원천봉쇄의 오류 밖에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자들이 무지몽매해서 진짜 문학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웹소설, 장르소설에만 빠져 있다"는 몇몇 오만한 글쟁이들의 푸념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2.

최근 보이는 또 다른 "『귀멸의 칼날』 우익론"은 주인공 탄지로의 캐릭터성, 그 무한에 가까운 선함과 신념에 대해 이른바 '심리 분석'을 해보려는 시도다.

'심리'라는 말이 붙은 많은 분석이 무척 재미있는 건 사실이고, 또 비평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정신분석비평' 등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면 정신분석비평은 단순히 작품에 정신분석학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비평 방법을 활용하기 전에 먼저 작품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며, 다양한 관점의 분석 방법 역시 함께해야 한다. 이를테면 구조주의 비평이나 신화형성비평 같은 것들 말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가 탄지로의 심리를 분석해봤는데 광인이래"라는 식의 말은 제대로 된 작품 비평이라기보다는 그저 재미로 보고 넘겨야 할 농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보다 우리는 좀 더 간단하게,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개념들을 활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탄지로의 캐릭터성은 현대문학의 '입체적 인물'이 아니라, 고전문학의 '평면적 인물'에 더 가깝다고 말이다. 이런 유형의 '창작된 인물'에게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분석을 들이대면 괴상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혹은 외재적 관점보다 먼저 내재적 관점에서 작품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국어 수업에서 배워왔듯이, 먼저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제대로 된 작품 이해의 순서다. '다른 관점에서 보기'는 항상 작품 뒤쪽,심화학습 부분에 있다는 걸 기억하자.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입시 위주로 돌아가는 일부 수업이, 작품 내용 이해도 전에 먼저 "이 시어는 이러저러한 시대의 아픔을 상징" 따위를 주입하려는 경향에 대해 나는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다시 『귀멸의 칼날』 이야기로 돌아와서,

탄지로의 심리, 혹은 성격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는 부분은 <무한열차편>에서 자신을 찌른 기관사를 두고 "내가 죽으면 저 사람이 살인자가 돼,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죽으면 안돼"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미리 "『귀멸의 칼날』 우익론"이라는 틀을 짜두면 이 말을 어떻게든 극우적인 성격으로,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으로 치부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이런 식의 비평은 다른 끼워맞추기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한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과연 "우익이나 파시즘을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들먹이는 것인가"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일본 서브컬쳐 비평에서 '우익'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다면 적어도 두 권의 책을 먼저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하나는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이라는 책인데,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기에 일단 기초만 쌓아두고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미완의 파시즘』으로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공부를 다지길 권하는 편이다.

역사적인 사례든 혹은 극우 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든, 우리는 탄지로의 저 대사가 우익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보통은 "대중동원"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파시즘의 중요한 특성은, 아주 거칠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타인이 자신의 신념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탄지로의 저 말은 자신의 신념이 '자신 안에서 완결'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와 비슷한 것이 쿄쥬로가 가족에게 남기는 유언인데, 아버지에게 '몸을 소중히 여기시라'는 한 마디 뿐이다. 자신의 곧은 뜻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완결되며, 심지어 동생도 검사의 길을 포기하면서 형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귀살대원들에게 남긴 유언 역시 '삶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에 대한 조언으로, 한마디로 '떳떳하게 살아라' 정도의 말이다.

이에 반해 무잔의 목표, 태양을 극복하여 진정 완전한 생물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그 수하들에게 '강요' 된다. 오히려 무잔이야말로 마지막에 '옥쇄'를 강요하는 일본군 수뇌부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은가.

이것을 두고 어떤 이는 '무잔은 귀축영미를 상징한다'고도 하지만, 그런 식의 말이 지니는 근거는 자신이 미리 짠 "『귀멸의 칼날』 우익론"이라는 틀 뿐이다. 그리고 그 틀은 다시 끼워맞춘 은유들을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훌륭한 순환논리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은 귀살대의 수장, 우부야시키 카가야다. 이 사람과 <선별시험편>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뚜렷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귀멸의 칼날』 우익론"의 아주 중요한 근거로 쓰인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외재적 관점'을 적용하기 전에 '내재적 관점'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칼의 많은 인물들은 '사연'이 있다. 때문에 얼핏 보면 입체적인 인물들을 많이 제시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사연이라는 '착시'로 그런 효과를 냈을 뿐 대부분은 매우 평면적인 인물 유형에 가깝다.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만 돌진한다.

작가 고토게 코요하루는 이런 인물을 만드는 데 있어 상당히 뛰어나고, 그의 그런 능력이 빛을 발한 인물이 바로 렌고쿠 쿄쥬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비평 방식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듯, 그의 장점이 모든 인물 형성에 있어 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부야시키 카가야는 일단 키부츠지 무잔의 대척점으로 창작된 캐릭터다. 말하자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혹은 '장치로서의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캐릭터가 늘 그렇듯이 중심이 제대로 잡히질 않는다. 즉 '귀살대는 살벌한 조직'이라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우부야시키가 있는 것이지, 우부야시키가 그런 성격이어서 귀살대가 그런 조직이 된 것이 아니다. 후자의 관점은 말하자면 '순서를 완전히 착각'한 것이라 하겠다.

<무한열차편> 초반부에서 희생된 조직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는 장면이 나오면서 뭔가 캐릭터성을 부여하려는 것 같지만, 이것도 꽤 흔한 클리셰인데, 당장 내 머리에 떠오르는 작품으로는 『뱀파이어 십자계』라는 만화가 있다.여기도 주인공이 천 년 동안 자신에게 희생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무한열차편> 초반부에서도 카가야는 희생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기억됨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일 뿐이며, 캐릭터성을 지닌다고 해도 나중에 클리셰를 통해 주입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 인간으로서 무잔과 대등한 일종의 '초인'을 만들어내려고 이것저것 설정을 덧붙이다보니(예를 들면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평온해진다든가) 이도저도 아닌 인물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우부야시키 카가야에 대해서는, 우익성을 드러낸다고 하기 전에 보다 단순하고 쉬우며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작가가 형성에 실패한 인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별시험편>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귀멸의 칼날』 의 적지 않은 측면이 그러하듯, <선별시험편>도 데뷔작을 그려내는 작가의 미숙한 구성력이 빚어낸 헤프닝에 더 가깝다.

물론 이러던 작가가 어느 날 타락해서 갑자기 극우의 기수가 되는 일도 드물게 일어나기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분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당장은 『귀멸의 칼날』이 우익 작품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스럽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친 소녀는, 암살 시도를 피해 도망친 국가원수 미리안이었다. 소년 주견하는 도와 달라며 내민 소녀의 손을 잡았지만, 음모에 휘말리며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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