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 충렬공파 33 대손 - gyeongju choessi chunglyeolgongpa 33 daeson

신분제에 가로막힌 비운의 천재 최치원
고려 건국의 이념을 쓰다 경주최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씨는 모두 43본에 216만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중 김씨였다가 최씨 성을 하사받은 수성최씨나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파악되는 충주최씨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신라 건국 시기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왕위에 올린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있다.

그중 소벌도리의 24대 손인 최치원의 윗대에서 분적된 본관과 그의 아랫대에서 분적된 본관으로 크게 나뉜다. ‘경주최씨상계세보’의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의 윗대(선대)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 동주(철원) 전주(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아랫대(후대)에서 분적된 본관은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扶安)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주 탐진 전주(순작, 균)가 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진주소씨도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중 최씨의 대종가를 이루는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충렬공파(忠烈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문밀공파(文密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관가정공파·광정공파·정랑공파·사성공파·화숙공파·충렬공파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경주최씨는 30만4722가구 총 97만68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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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집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최준의 생가. 최준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한 최진립의 후손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꾼이 나오고, 10대에 걸쳐 진사 벼슬을 했다. 경주이씨 이회영·이시영 일가와 함께 지도층이면서 사회적 책임도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문가로 꼽히고 있다.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최씨의 원조인 소벌도리는 사로국(斯盧國)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의 촌장이다. 그는 우물가(나정)에서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거두어 기른 후에 알천양산촌의 촌장 알평 등과 협의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공으로 유리왕(32년)에게서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때 돌산고허촌이 사량부로 개칭되었다. 또, 516년에는 사량부 대인(大人)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되었으며, 문무왕 대(658년)에는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에 추봉했다고 한다. 지금도 경주 양산재에서는 매년 가을 6부 대부족장들의 개국원훈에 감은하는 향사인 신라대제가 국가 문화제 행사로 봉행 되고 있다.

최씨의 대종가를 이루는 경주최씨는 소벌도리의 24대손인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한문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함께 유학한 최승우 등과 함께 신라 하대를 빛낸 인물이다. 그는 857년(신라 헌안왕1) 신라의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고운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가 되는 해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서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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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집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최준의 생가. 최준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한 최진립의 후손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꾼이 나오고, 10대에 걸쳐 진사 벼슬을 했다. 경주이씨 이회영·이시영 일가와 함께 지도층이면서 사회적 책임도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문가로 꼽히고 있다.
최치원기념관 개관식 사진. 중국 양저우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최치원을 기리고 있다.
879년(헌강왕5)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그는 28세가 되던 해 당나라 희종의 조서를 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태산(太山·지금의 태인)·함양(咸陽)·부성(富城·지금의 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를 상소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 했으나 6두품이라는 골품제도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천을 떠돌았다. 그 후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신라의 천재였으나, 6두품 출신으로 아찬 이상의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시문학에 뛰어나 토황소격문뿐 아니라 ‘계원필경’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산천을 떠돌면서 쌍계사 진감선사비문 등 국보급의 금석문을 남겼다. 사상적으로는 유교·불교·선교 통합을 시도했고, 그의 사상은 증손인 최승로를 통해 고려 건국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와 종형제 간인 최승우도 최치원과 함께 유학한 뒤 890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최언위 역시 885년에 급제한 뒤 집사성시랑을 지냈다.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자사부·문한·평장사를 역임했으며, 삼한벽상공신에 올랐다. 이들 3명을 가리켜 신라 3최라고 일컫는다. 이들 외에도 최씨는 신라인으로는 당나라의 과거에 가장 많은 급제자를 낸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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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최치원 동상 앞에서 제향을 올리는 경주이씨 문중. 해운대는 최치원이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최치원 동상이 있다. 매년 경주최씨 문중에서는 이 동상 앞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고려시대 맹위 떨친 경주최씨

이렇게 신라 하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씨가문은 고려에 들어와서 맹위를 떨쳤다. 선·후 안동김씨가 맹위를 떨친 조선을 ‘안동김씨의 나라’라고 별칭하는 것처럼, 고려시대를 ‘최씨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주최씨나 경주최씨로부터 분적한 최씨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나왔다.

고운 최치원의 증손인 최승로(崔承老·최치원의 손자 최은함의 아들)는 재능이 특출하여 왕건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12살에 태조 앞에서 논어를 암송하였으며, 태조는 그를 원봉성(元鳳省)의 학사로 보냈다. 그 후 최승로는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셨다. 그 과정에서 새로 창업한 고려의 각종 문물제도를 마련하고, 군제를 개편하는 내용의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시행케 했다. 이를 통해 고려의 국가 기틀을 정비하였다. 이는 조선의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의 기틀을 정비한 정도전의 역할에 비견될 만한 일이다.

이렇듯 경주최씨는 고려시대 들어와서 가문이 크게 흥하면서 각 파가 형성되었는데, 각 분파별로 가문을 빛낸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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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적조탑비(국보 315호), 이 외에도 최치원은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 등 수많은 국보급 금석문을 남겼다.
먼저 화숙공파에서는 최치원의 9세손으로 충숙왕 때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지냈던 화숙공 최현우(崔玄祐)는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의 자손으로 6세손인 최형손(崔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최한홍(崔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그의 종질인 최호(崔湖)는 무과에 장원하고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었다.

최현우의 8세손인 최숙생(崔淑生)은 성종 때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했던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최계종(崔繼宗)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하였다.

관가정파(觀稼亭派)의 파조는 최청(崔淸)이다. 그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권신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다. 1374년(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았으며,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명나라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조선 개국 이후 은거하자 태조 이성계가 좌찬성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가옥에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기 때문에 관가정파가 생겨났다.

계림군파의 파조 최탁(崔倬)은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崔齊顔)의 증손이다. 그는 고려말에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열공파조 최광위(崔光位)는 최제안의 손자로 고려 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원래 이름(초명 初名)은 최광훈(崔光勳)이었으나, 왕이 그의 공을 높이 사 광위(光位)로 지어줬다.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랑공파조 최호(崔灝)는 고려 정종 때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저술하였다. 사성공파 최예(崔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밀직공 최선지의 5세손이며, 문숙공 최선의 아우인 문밀공 최제(崔堤)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문정공 최해(崔瀣)는 원나라에서 제과에 급제한 후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지냈다. 그 후 귀국하여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 ‘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문호로 이름을 떨쳤다.

그 외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우봉최씨의 최충헌과 최우 등은 4대에 걸쳐 무인정권을 장악함으로써 60여 년간 고려를 통치하며 30년에 걸쳐 대몽항쟁을 이끌기도 했다.

조선후기 경주최씨의 부활

이렇게 고려시대에 명성을 떨치던 경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쇠락했다. 경주최씨 가문에서 조선시대 전체 과거급제자는 모두 669명이지만, 문과급제자는 42명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명문가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상신과 대제학 등의 벼슬에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시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던 거대 명문집안의 위상에 비해 많이 쇠락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와 현대에 들어와 경주최씨 가문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천도교인 동학을 일으켰던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있다. 그는 경주 귀미산(龜尾山) 용담(龍潭)에서 득도하여 동학을 창설했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제자 해월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한말(韓末)에는 이항로의 제자로 위정척사를 주장한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유명하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정책을 탄핵하였으며, 항일구국 항쟁의 선봉에 나섰던 유학자였다. 그는 1855년(철종6)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때 호조 및 공조판서와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궐기와 투쟁을 촉구했다. 일제가 그를 대마도에 귀양 보내고 단발을 강요하자,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그 외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외솔 최현배(崔鉉培)가 있으며,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가 된 경주 최부잣집도 유명하다.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만석꾼, 10대 진사의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현대 인물 중에는 최문환 전 서울대총장이 있으며, 최용덕(전 체신부장관)·최인규(전 내무부장관)·최형섭(전 과기처장관)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최종환(삼환기업회장)·최준문(동아그룹 명예회장) 등이, 정치권에서는 최형우(5선 국회의원·전 내무부장관)가 있다. 그 외 최씨는 방송연예계에서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그 중 최민수·최수종 등이 경주최씨로 알려져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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