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열흘간의 항쟁(1980.5.18.~5.27.)제1장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GO >제2장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GO >
제3장 5·18민주화운동과 유혈 진압 GO >
제4장 5·18민주화운동의 부활 GO >
『5‧18 열흘간의 항쟁』 (2020, 5·18기념재단) 발췌참고 문헌
영화 '화려한 휴가'를 한 번 봤을 뿐 어렴풋이 만 알고 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얄팍한 상식이나마 쌓기 위해 그 배경과 과정을 요약,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1. 개요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군부를 장악한 것을 규탄하고자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 2. 전개1)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 안전가옥에서 당시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하면서 헌법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사 합동수사 본부장으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된다. 10·26 사태에 대한 전모를 파헤치기 위해 전두환 합동수사 본부장은 중앙정보부와 경찰 등의 정보·수사기관을 장악하면서 권력 공백기를 틈타 실세로 떠오른다. 2)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반란세력은 최규하 대통령 관저, 국방부, 육군본부 등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군사 반란에 성공한 후 서울 군 요직에 하나회 인물들을 앉혀서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3) 1980년이 되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면되는 등 서울의 봄이 왔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대학들의 유신정권 붕괴를 기점으로 그동안 억눌렸던 사회 전반의 주장과 요구가 폭발했다.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정부와 군부에 대한 정치 투쟁으로 변화하면서 육본이 소요진압 준비를 진행하는 등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4) 국회에서도 비상계엄을 해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전두환, 노태우의 압박으로 비상 국무회의를 열렸고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18일 최규하 대통령은 지역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전환하고 국가 기강과 사회 안정에 조치를 취한다는 5·17 조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5) 18일 오전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의 충돌을 시작으로 항쟁이 시작되어 27일 끝내 진압되었다. 3. 이후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고, 1995년 말 노태우와 함께 구속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두 사람에게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 3심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 지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사면 복권되었다. 2021년 현재에도 91세의 나이로 여전히 살아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5ㆍ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입니다. 전개과정공법단체 5ㆍ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홈 > 5·18 민주화운동 > 전개과정 5월 17일 토요일0시 비상 계엄령 확대실시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계엄포고 10호를 통하여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씨를 비롯한 정치인 수백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더불어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을 투입했으며 특히 서울과 광주가 주요 공격의목표였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 공수여단이 배치되었고 광주 7공수여단33대대 35대대로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시위 진합 훈련을 수련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가 무력으로 진압을 함으로써 5. 18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교문과 일정한 거리를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계속 외쳤다. 이때까지는 돌을 던지거나 어떤 물리적 방법도 동원되지 않은 평화적이고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시위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 방송을 한후,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와서 잡히는 학생들마다 곤봉으로 머리와 어깨 등을 구타하고 군화발로 걷어차거나 짓밟고 연행하였다.당시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등 이였다. 7공수여단은 주둔지 전남대학교를 나와 강력한 시위 진압을실시하였다. 시위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쫓아가 무차별 때리고 짖 밟았으며 쓰러진 사람은질질 끌고가 트럭에 실었다. 이러한 행위는 광주시민을상대로 한 학살 극이라 할 만큼 무자비하고 난폭했으며 진압봉과 대검으로 때리고 찔렀으며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 쫒아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혀 포박 연행했다. 이때 연행자는대학생 114명, 전문대생35명, 고교생6명, 재수생66명, 일반시민184명 등 합계 405명이었으며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대검)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였다고 2군 사령부 계엄상황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전해진다. 5월 19일 월요일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를 즐겨라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지만 일손을 거의 놓고 18일의 공수부대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를조성하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자며 몇 명씩짝을 지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2,000∼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에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시민들은 그냥 쫓겨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경 모든 이동을 마친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다.11시 30분경 다시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대상이었다.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구타 한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시가지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이 백주대로에서 자행된 것이다.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이어...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시위의 양상은 수세에서공세로 바뀌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대중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바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행위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 가는 사람 수에 비해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