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중립외교 단점 - gwanghaegun junglib-oegyo danj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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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r. 1608-1623)은 한 조카가 주도한 계해정변(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정변 바로 다음날 대비의 이름으로 반포된 반정교서에 따르면, 정변의 명분 곧 광해군의 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군부의 나라인 명을 배반하고 이적인 후금과 화친을 도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후를 핍박하고 형제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광해군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동요 없이 거의 절대적인 평가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전통적 평가에 대한 비판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이른바 근대 역사학자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외교노선을 중립정책이자 당시 조선왕조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정책으로 새롭게 평가하였다. 그들은 이른바 廢母殺弟 행위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당시 권력을 농단하던 北人에 돌림으로써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이런 수정주의적 해석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사실상 통설이 되었다. 2000년에 출간된 한명기의 『광해군』은 이런 수정주의적 흐름을 잇고 그것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런데 2012년에 출간된 오항녕의 『광해군』에서는 이런 수정주의적 해석을 전면 부정하고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조선시대의 상태로 회귀시켰다. 이 비평논문에서는 이 두 책을 함께 놓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되, 국왕으로서 광해군이 행한 몇몇 정책뿐 아니라 그의 삶과 심리상태에도 중점을 두어 사안별로 살핀다.

King Kwanghae (r. 1608-1623) was deposed by the Palace Coup of 1623 launched by his nephew. According to the royal message promulgated in the name of the Queen Dowager immediately following the coup, the causes for the coup, or King Kwanghae’s crimes, can be roughly divided into two main categories: King Kwanghae’s betrayal of Ming China to the barbaric Manchu and the persecution of the queen dowager and princes. This negative view of King Kwanghae was absolute for about 300 years until the last day of the Chosŏn dynasty. It was not until the 1930s that such a traditional view began to draw criticism. Detractors evaluated King Kwanghae’s foreign policy as neutralist and the best choice Chosŏn could have made at the time, turning between two powers, Ming China and the Later Jin (Manchu). As for the issue of the queen dowager, they blamed the Senior Northerners and portrayed King Kwanghae as victimized of factional strife. This revisionist interpretation was transmitted to the post-1945 Korean scholars. Han Myŏnggi’s Kwanghaegun, published in 2000, was a monograph that lined up with the revisionists and summed up their interpretations. O Hangnyŏng’s Kwanghaegun, published in 2012, however, rejected revisionist interpretations and supported the traditional view of King Kwanghae. With emphasis on King Kwanghae’s mentality and his policies and politics, this review article critically examines the two conflicting views of King Kwang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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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jo Restoration, Palace Coup of 1623, Han Myŏnggi, O Hangnyŏng, Chos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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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06년도 과제물로 썼던 글이다.
당시 기반이 되었던 것은 역사 스페셜이었을 것이다. 나름 관련 논문도 찾고 쑈를 했지만 지금 봐서는 썩 잘된 결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냥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는 정도로 넘어가기를 바란다. 첨언은 끝에 덧붙일 생각이다.

참고로 이글로 논쟁을 하고픈 생각은 없다.

광해군에 대해서는 엔하위키의 '광해군'이 꽤 논란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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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툰부대의 이라크파병, 6자회담,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 주한미군 철수, 이런 말들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제까지 미국아래에서 조용히 흘러가던 한국의 주변정세가 이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들의 움직임에 의해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 시시비비 이런저런 얘기가 많다. 또 미국의 약화 혹은 중국의 성장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시하기도 하면서 과연 어디를 따르는 것이 더 우리에게 필요한가 등을 얘기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16세기말과 17세기 초에 있었던 명-청 교체기가 그것이다. 광해군대의 조선조정은 명과 후금의 힘과 한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립외교정책을 사용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에 피폐해 있던 조선을 잠시나마 전란위기에서 비껴가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란 어떤 것이며 당시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교훈이 될 수 있을까?

1. 임진왜란 이후의 요동, 명, 그리고 조선의 정세

일단 광해군대의 중립외교를 바라 보는데는 당시 상황을 살펴 보는게 도움이 될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했을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10년정도가 지난 후였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것은 역시 전란의 중심지였던 조선이었다. 국토의 2/3이상이 전란에 휩싸여있었고 도성은 파괴 되었다. 그리고 곡식생산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3남 지방은 아주 오랫동안 정부의 지배를 떠나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피해복구에 힘을 기울여야 했지만 왕권약화에 따른 국왕과 신료들의 주도권싸움 덕에 그리 발빠른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어찌 보면 의아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정치적 지지세력이 거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오래 전에 죽었고 그는 장자도 적자도 아니었다. 그는 전란 중에 허울뿐인 왕세자라는 직책을 부여받고 분조를 이끌면서 조선 각지를 돌며 왜구에 대항한 것, 어찌 보면 그것뿐이었다. 게다가 선조의 생전에 그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나타났다.

선조와 정실인 인목대비 사이에서 출생한 영창대군이었다. 선조는 광해군을 대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지만 그가 미처 장성하여 왕세자책봉도 하기 전에 선조는 붕어하였고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듯 겨우 왕이 된 광해군이지만 아직 명나라는 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광해군의 세자 직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물으러 사신을 파견하기까지 하였다[1]. 전란 이후 중심이 되어 재건에 앞장서야 할 조선의 조정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명나라의 경우에도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조선에 은혜를 베푼다고 군대를 파병했지만 이익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없었다. 5년동안 파병군으로 구성되는 50만을 유지하는 세금이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왕조가 계속되면서 왕족과 하급 귀족들에게 줄 녹읍이 늘어났다. 세수부족으로 인한 과도한 징세로 인해 명나라는 끊임없는 농민반란과 지방과 중앙정부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를 진압하고 달래는 데 큰 전력을 소모하고 있었다.[2]


 
 요동을 감싸고 있는 두 나라가 내부의 문제로 정신 없는 사이에 요동내부에서는 누르하치가 새로운 강자로 출현하였다. 건주여진의 수장이었던 그는 명나라로부터 1595년 용호장군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초기에는 명나라에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등의 이유로 명나라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만주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그리고 광해군 5년(1613년) 분열되었던 세력을 병합하였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 국경내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민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동등한 위치의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 8년(1616년) 누르하치는 칸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나라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면서 명과 조선 사이에 미묘한 기류를 생성시키기 시작했다.

2. 후금의 위협과 조선의 전략

누르하치는 후금의 건국과 함께 기존의 명에 대한 조공을 끊었다. 이는 더 이상 명나라의 속국도 아니오,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명나라와 조선은 후금의 성장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명나라의 경우에는 국내의 혼란이 아직 진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후금의 침입을 받는다면 나라가 위험한 지경에 빠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조선의 경우도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기전에 또 다른 적을 상대로 전쟁이나 분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경우에는 임진왜란직후 강력한 무기로 떠오른 총포에 사용되는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중국에서 전량 수입했었기 때문에[3] 후금에 의해서 만약 명나라로 가는 통로가 끊긴다면 명나라의 정치적, 군사적 공조를 위한 통신은 물론 국내 방어력도 심대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듯 후금의 위협이 점점 현실화 되고 있을 때 명나라와 후금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1618년 후금은 명나라의 푸순을 급습하고 칭허를 빼았았다. 후금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자 명나라는 후금 정벌을 위한 병력파병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임진왜란때 은혜를 입은 명나라를 도와 파병하여 후금을 제압하는데 협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이에 대해 광해군은 파병을 반대했고 비변사는 찬성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의견이었지만 조선조정의 명과 후금에 대한 당시 상황 판단은 비교적 정확했다. 일단 명의 후금 제압에 대해서 양측 다 명나라가 후금을 제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4]. 또 파병이 이루어질 경우 후금에 의한 조선침공 시나리오 역시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의견을 서로 공유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임란 이후부터 북방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면서 정보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광해군은 함북병사인 이시언으로 부터 직접 요동반도의 정세를 들을 정도였고 비변사 역시 북방에서 들려오는 각종 정보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등한 정보바탕으로 하였음에도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린 이유는 양측의 입장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양측은 조선파병으로 인해 후금이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비변사는 좀더 명확하게 후금이 침공한다 할지라도 명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피해가 북부 일부 지역에 한정될 것으로 판단했다.[5]

이 침입에 대한 대응 역시 양측은 서로 달랐다. 비변사에서는 최악의 경우 임진왜란 때 와 같이 조.명 연합군으로 구성하여 후금의 침입을 격퇴 혹은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그러한 선택은 피해야 했다. 이미 임진왜란 때 명군이 조선으로 진주하면서 겪었던 사회적 피해와 또 정치적 압박, 왕권 약화[6]등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경험하기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후금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으면서 국내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명나라와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3. 조선의 중립정책의 경과

명나라의 파병요구에 대해 광해군은 집요하게 파병불가논리를 내세웠고 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명나라에 진주사를 파견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사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7].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에 굴복하였고 비변사를 중심으로 하여 파병군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파병군의 수장은 문관출신으로 비변사의 구성원이었던 강홍립이었고 파병군은 1619년 2월 명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보름뒤 심하에서 조.명 연합군은 후금의 군대에 크게 패했다. 당시 강홍립은 한차례 패배이후 후금에 항복하고 살아남아있는 군사들을 보전하였다. 여기에서 강홍립의 행동은 단순한 항복이라기보다는 강화을 위한 행동으로 보는 편이 더 합당할 듯 하다. 그는 항복후 누르하치를 만날 때 고개를 숙여 절하지 않고 읍[8]을 하는 것을 예를 다했다. 이는 비변사가 심하 전투후에 후금에 보낼 사신을 보낼 때 생각했던 의례와 동일한 것이었다.[9]


이러한 연유로 연려실기술에 나와있는 광해군의 강홍립에 대한 밀조는 가능성이 낮아보인다. 파병군의 지도부인선은 전적으로 비변사가 관여하고 있었고
[10] 파병군의 패배는 곧바로 비변사입지의 약화를 의미한다. (실제로 패배소식이 전해지자 광해군은 비변사를 강하게 몰아붙였고 인사변동을 단행했다.[11]) 그렇기에 비변사의 인물인 강홍립을 불러 광해군 개인적인 지시를 내리고 또 그것을 비변사가 선정한 파병군 지도부 전체에 납득시키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비변사의 최악을 상정한 또 하나의 카드라고 생각된다.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은 항복장수가 아닌 외교관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파병은 조선의 뜻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리고 후금내에서 조선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갔다. 대표적으로 조선과 후금 사이에 교환된 첫번째 친서의 경우이다. 후금이 보낸 친서에 대해 조선 조정은 애매한 말로 답변을 하였고 이에 대해 후금의 왕인 누르하치는 대노 하였다. 하지만 당시 후금에 머무르고 있던 강홍립이 나서서 외교문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문제가 일단락되기도 했다.


후금에서 상주하면서 이들로부터 전해져오는 후금 정세에 대한 보고는 조선 정부에게는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다만 그들의 당시 위치가 후금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조선에게는 사상누각 같은 존재였고 또 이러한 교류가 만약 명나라에 알려지게 될 경우 정치, 군사적으로 큰 타격이 불가피했으므로 이들을 전적으로 감싸고 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해군은 이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병군의 후금 항복 직후에 요구되었던 관련자들의 가솔에 대한 처벌등의 악재는 최대한 피하면서 명나라와의 공조를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명나라에서는 조선 파병군의 항복에 대해 굉장히 의심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극단적인 형태의 조선 감호론이 명 내부에서 힘을 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심하에서의 전투는 조선뿐아니라 명나라에게도 적지않은 피해를 안겨줬고 또 후금과의 대치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명나라는 더욱더 곤란한 지경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는 조선의 파병에 대해서 격려하면서 별다른 대응을 할 수는 없었다.
[12]

4. 광해군대 외교정책의 결론과 현재적 의미

  파병군의 항복이후 조선 정부는 항복한 인물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후금의 조선에 대한 위협도를 낮춰나갔다. 그리고 있었던 명나라의 2차 파병 요구시에 광해군과 비변사가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조선은 2차 파병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의 대명.대후금 외교가 안정화 단계로 들어 섰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중립외교정책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막을 내렸다. 비변사는 더 이상 중립위주의 정책을 펼칠 필요가 없었고 인조는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임진왜란이 있은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1636년 다시금 조선땅은 외적에 의해서 유린당했고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고 땅에 찍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만약 광해군이 집권을 계속하여 중립외교를 계속해 나갔다면 과연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애매한 문제이다. 본래 중립정책은 적어도 양측의 세력이 동등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고 광해군대의 그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을 겪었던 시기처럼 한쪽이 완전히 쇠퇴하고 다른 한쪽이 강성해졌다면 중립외교정책이라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 그대로 중립 정책의 계속이었다면 그 결과는 병자호란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국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당시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 명이 아닌 청으로의 또 다른 사대주의로 변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당시의 중립정책이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 취하게 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는 조선시대와는 다르다. 주변국들은 매우 많고 또 복잡하고 세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시기적 특성이나 주변정세는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은 20년전에 끝났고 우리나라를 아우르고 있었던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력도 이제는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쪽으로부터 중국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공조, 자주, 친미, 반미, 친중등의 말은 현재의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여전히 강성한 미국과 그 틈을 파고드려 하는 중국, 공산주의의 굴레를 벗고 도약하는 러시아, 미국의 아래에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픈 일본, 여기에 북한까지 합하여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의 이해관계와 명분론은 끝이 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와중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계속해서 해야 함은 틀림없다. 선택이 옳은지를 선택한 그 때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각각의 선택에는 나름대로의 명분도 있고 나름대로의 실리 역시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정보를 가지고 멀리 보면서 어떤 것을 따르냐에 달린 것이다.

광해군의 예에서 보듯이 중립외교란 혼란한 시기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립은 명분론자에게는 지조가 없는 것처럼 보이며 실리주의자들에게는 느려 보인다. 광해군은 이러한 중립의 한계성을 국내에 제대로 인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현재와 동일한 과거의 역사는 없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의 본보기가 될 수는 있다. 우리에게는 병자호란과 한일합방과 같은 어쩌면 치욕적이면서도 아주 강렬한 본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치욕을 역사에 다시 새기고 싶지 않다면 주변국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정보를 통해서 최선의 선택을 찾고 또 그것의 정당성을 국내에 충분히 인식시켜서 국론의 분열을 막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찾아야 할 길일 것이다.

참고자료

          - 조선감호론을 통해서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 계승범

          - 광해군대의 파병 이라크파병을 뒤돌아 보며 한명기.

          - 광해군대의 요동정책과 조선 포로 고윤수.

          -  네이버(http://naver.com) 지식in (누르하치. , , 선능)

          - 디씨인사이드(http://dcinside.com ) 역사갤러리

- 조선 광해군대의 정치적 대립- 김민경.

- 명말 동아시아의 정세와 서광계의 외교론.- 김형석

-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1]조선 광해군대의 정치적 대립- 김민경.

[2]명말 동아시아의 정세와 서광계의 외교론.- 형석

[3]광해군 일기 13 9월 을묘

[4] 광해군일기 10년 윤 4월 계유. 10 4월 을사

[5] 광해군일기 10 7월 무자

[6]광해군대 조선의 요동정책: 요동출병과 후금에 억류된 조선군 포로 문제를 중심으로-고윤수

[7] 광해군일기 10 6월 병자.

[8]인사하는 예의 한 가지.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고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가 펴면서 두 손을 내림.

[9] 광해군일기 11 4월 갑술

[10]고윤수 의 저서- 상동.

[11] 광해군일기 11 4월 신유

[12]고윤수 의 저서-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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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멋들어진 생각때문에 이 글을 올렸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남. 나중에 기억이 나면 올리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