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한글 창제 - sejongdaewang hangeul changje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대왕이 한글 만들 때 누가 도왔을까요?

[훈민정음 창제(1443)]백성 위해 우리 글자 만든 세종대왕… 1443년 완성해 3년 뒤 반포했죠왕자들과 집현전 학자가 편찬 돕고 정의공주가 연구에 도움줬단 기록도

오늘은 우리 글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국경일로 정한 한글날이에요. 1443년 세종대왕이 우리 글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어 3년 뒤 세상에 널리 알리게 했지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이에요.

그런데 훈민정음이 언제부터 한글이라고 불리게 된 걸까요?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한동안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상스러운 글)'이라고 낮춰 불렀어요. 1910년대 초반, 주시경을 비롯한 국어학자들이 그런 풍조에 반발해 '한글'이라고 고쳐 부르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흔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세종대왕 말고도 여러 인물이 한글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을 거라고 짐작해요. 그중엔 세종대왕 딸이었던 정의공주(貞懿公主·1415~1477)도 있지요. 정의공주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떤 식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을까요?

◇'임금이 친히 28자를 만드셨다'세종대왕이 우리 글자를 만든 이유는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자기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쓰여 있어요.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법을 제대로 알 수 없어 무엇이 죄가 되는 줄 몰라 억울한 일을 자주 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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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정서용

중국에서 빌려온 글자인 한자는 우리말을 제대로 옮기기도 어렵고,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이 배우기엔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도 한자가 아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자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이 반발했어요. 사대부는 조선시대 문관 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당시 조선은 중국 예법과 제도를 본받아 이미 오래전부터 한자를 쓰고 있었어요. 사대부 중에는 '새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건 중국을 본받는 대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또 배우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백성들이 글자를 알게 되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만하게 생각해 한문을 공부한 사대부들에게 함부로 대들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세종대왕은 신하들 모르게 직접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을 했을 거라고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어요.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사람들세종대왕이 손수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고 기록돼 있어요. 세종 때 엮은 음운학 책 '동국정운'에도 '훈민정음을 어제(御製)하셨다'는 대목이 나와요. 임금님[御]이 몸소 만들었다[製]는 뜻이지요.

한자어 중국 발음을 한글로 적어놓은 '홍무정운역훈' 서문에도 '우리 세종대왕께서 운학(韻學)에 마음을 두고 깊이 연구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셨다'고 적혀 있어요. 운학은 한자 음운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해요.

세종대왕이 직접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해도, 도움을 준 이들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다만, 누가 어떤 도움을 줬느냐 하는 대목에서 후세의 의견이 분분하게 갈라지지요.

어떤 역사가들은 세종의 장남인 세자 향(훗날 문종)을 비롯해 수양대군(훗날 세조), 안평대군(문종과 세조의 동생) 같은 세종의 왕자들이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봐요.

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같은 젊은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을 거라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어요.

정의공주가 도왔을 거라는 주장은 죽산 안씨 가문의 족보인 '죽산 안씨 대동보'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어요. 죽산 안씨 가문은 정의공주의 시댁이에요. 이런 내용이 소설이나 TV 드라마로 다뤄지기도 했지요.

◇세종의 사랑을 받았던 정의공주정의공주는 어떻게 세종대왕을 도왔을까요?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는 아들 8명과 딸 2명이 있었어요. 정의공주는 그중 둘째 딸이었어요. 세자 향의 누이동생이자 수양대군의 누나였어요. 맏딸 정소공주가 13세 나이로 일찍 죽어서, 둘째 딸인 정의공주가 세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해요. 훗날 죽산 안씨 가문의 안맹담(安孟聃)이라는 선비와 결혼해 궁궐 밖에 살면서도 세종대왕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어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역산(曆算)에 밝아 세종이 사랑하였다'는 정도로만 기록돼 있어요. 지금으로 치면 천문학과 수학을 아주 잘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죽산 안씨 대동보'에는 더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어요.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우리말의 다양한 발음을 담으려면 어떤 모음과 어떤 자음을 만들어야 하는지 깊이 고민했다고 해요. 여러 대군에게 물어봤지만 다들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정의공주가 명쾌한 답을 내놓아 세종대왕이 크게 기뻐하며 칭찬했다고 해요.

다만 '죽산 안씨 대동보'는 나라에서 작성한 공식 기록이 아니라, 한집안의 사사로운 기록이라 역사 연구 자료로 쓰기에 어디까지 얼마나 신뢰하는 게 좋을지 논란이 있어요. 무엇보다, 세종이 자식들에게 던진 질문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의공주는 구체적으로 뭐라고 대답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쉬워요. 혹시 후손들이 공주의 공적을 너무 부풀려서 적은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지요.

'한글 혁명'·'훈민정음 해례본 입체강독본' 펴낸 김슬옹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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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의 훈민정음 영상 전시물.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5세기 훈민정음 창제는 문자 생활을 송두리째 바꾼 혁명이었습니다. 한글은 자연스러운 문자 발달사와 궤를 같이하지 않고 느닷없이 나타났습니다. 실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학회 연구위원으로 지난 2015년 훈민정음 해례본 복간을 주도한 김슬옹 박사는 9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한글은 인류가 꿈꾸는 문자의 이상을 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글을 주제로 다양한 논문과 교양서를 쓴 김 박사는 한글날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20주년을 맞아 '한글 혁명'(살림터 펴냄)과 '훈민정음 해례본 입체강독본'(박이정 펴냄)을 출간했다. 그는 '한글 혁명'에서 한글 창제를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를 설명했다.

김 박사는 "한글은 사람의 말소리뿐만 아니라 온갖 자연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 문자"라고 평가하면서 "이는 인류가 고안한 유구한 문자인 알파벳과 한자는 갖지 못한 미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글의 또 다른 특징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배우기 쉽다는 점을 들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이중 언어생활을 했다. 말로는 "난 책을 좋아해"라고 하면서도 글로는 '我好冊'(난-좋아해-책을)이라고 기록했다.

김 박사는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도 고전을 자유롭게 읽고 쓰려면 10년은 공부해야 했다"며 "한자는 양반의 전유물이자 특권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글을 제외하면 지구상 어떤 문자도 소외층이나 하층민을 배려해 만든 경우는 없었다"며 "세종은 양반이 독점하던 지식과 정보를 백성이 배우고 나눌 수 있게 했다"고 역설했다.

문자와 언어의 일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예컨대 조선시대 양반은 '뒤죽박죽'을 '錯綜'(착종)이라고 썼다. 김 박사는 "18세기 한문 실력이 최고였던 정조 임금도 한문 편지에서 '뒤죽박죽'만 한글로 적었다"며 "감정과 느낌을 비로소 소상히 글로 남길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한글 창제는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세종대왕 한글 창제 - sejongdaewang hangeul changje

김슬옹 박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면서 그는 한글을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함께 만들었다는 견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한글은 세종이 단독 창제한 것이고, 그것을 해설한 책은 관료들과 집필했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 의견"이라며 "한자가 양반 기득권의 상징이었던 시절에 문자 창제를 공개적으로 진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글을 세종의 독자적 발명품으로 봐야 하는 근거로 조선왕조실록에 한글 창제에 관한 기록이 1443년 12월 30일에 갑자기 나온다는 점과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라는 구절을 제시했다.

김 박사는 "집현전 협찬설은 문자 창제를 혼자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과 영웅주의를 비판하는 민중사관으로 인해 제기됐다"며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한 신하들조차 한글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글은 디지털 시대에 잘 어울리는 문자입니다. 글자와 소리가 규칙적으로 대응하고, 글자의 짜임새가 체계적입니다. 이러한 한글의 가치와 우수성을 계속해서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10/09 07:3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