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장 설교 - galladiaseo 1jang seolgyo

[장별설교] 갈라디아서1장 다른 복음은 없다

[갈라디아서 서론]

오늘 저희는 경이로운 문서를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대개 신약성경을 읽을 때 네 복음서가 있고, 그 다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공동서신들이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성경의 구조는 자연스러운 연대기적 흐름을 따른 것입니다. 3세기 중반쯤에 정경이 확정되면서 순서가 재배열되어 지금까지 이른 것입니다.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성도들이 굳이 알아야할 내용은 아니지만, 복음서보다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빠른 시기에 기록된 문서들이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초대교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신칭의 교리가 로마서와 더불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신칭의는 율법에 의지했던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배격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교리를 다룰 때 주의해야할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 교사들에게 반론하기 위해 행위가 거의 배제된 듯한 이신칭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살폈던 고린도 전후서의 경우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위를 가진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와 구원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만을 본다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짧은 새벽시간에 바울신학을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구원과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진정한 의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前提)하고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길 한 가운에서 자동차에 치일 위기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기서 차가 오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갈라디아서는 바로 그런 장면을 닮아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된 교리를 받게 됨으로 예수를 믿은 믿음에서 떠나 잘못된 행위구원으로 전락하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바울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서신보다 강열하고 흥분된 바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5절 인사말

2.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3. 11-24절 복음의 기원

세 번째 부분은 1:11에서 시작하여 2:10절까지 이어집니다. 오늘은 2.3 부분을 중심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는 주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2.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은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격앙된 마음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과 8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를 비교합니다. 7절에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9절)라고 선포합니다. 10절에 의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이며, 바울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역자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목적은 복음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복음을 변형시켜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고,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여 그들의 영혼을 강탈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무능을 철저히 드러내고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거의 완벽해 보이지만 목적은 너무나 다른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지만, 실제로는 복된 소식이 아닌 악한 소식입니다.

*가만히 들어오다의 원 뜻은 '곁에서 들어오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들은 정식적인 통로가 아닌 속이는 방법으로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3. 11-24절 복음의 기원

바울은 가장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밝힙니다. 11-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11절)에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은 것’(12절)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디서 그 복음을 받은 것일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로 말미암은 것’(12절 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밝힌 다음, 자신이 어떻게 그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 설명합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 학교였던 가말리엘 랍비에게 율법을 배우게 됩니다.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율법에 열심을 냈습니다. 14절에 의하며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엄청난 열심으로 유대교를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14-15절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복음 자체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는 이 ‘은혜’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 곧 소명을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16절)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사도행전 9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메섹에 있던 경건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다음 행보는 정말 놀랍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설득하기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16절 하) 않았습니다. 또한 17절에 의하면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은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의 승인을 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고, 다시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삼 년’(18절)이 지난 후 게바(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십오 일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게바는 만나지 못하고 ‘주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났습니다. 21절에 의하면 바울이 그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다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1차 전도 여행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 의해 교육을 받거나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계시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바울의 복음이 갖는 특징을 정리 봅시다.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게 전해 받은 것도, 사람의 지혜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바울을 만나 전해주신 계시(ἀποκάλυψις)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선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소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 1:8로 돌아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유대인의 문화과 관습,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예수 그 분 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목: 다르게 시작하기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절~5절

설교자: 이병권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교회들의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그 교회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그러합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바로잡고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계속 살펴보면서 조금씩 더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알아가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서론입니다. 바울은 당시 편지를 쓰는 형식에 따라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성경이니까 바울이 특별하게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고 편지 형식과 관련 없는 특별한 글을 쓰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읽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 형식에 맞게 그의 편지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직접 편지를 쓰는 일이 별로 없어서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도 편지를 쓸 때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형식이 있습니다. 받는 사람, 인사말, 편지의 내용, 마지막 인사, 쓴 날짜, 보내는 사람 등등, 편지를 쓸 때는 이러한 형식에 맞게 글을 씁니다. 그런 것처럼 바울도 그런 형식에 맞춰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편지 형식이 어떠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편지를 쓸 때는 서론에 다음 요소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간단한 인사말 등입니다.

그런데 서론의 각 요소들이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상황이나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에 따라 편지를 구성하는 요소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합니다. 교회에 따라서 편지의 형식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서론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점들은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의 서론을 보면 바울이 다르게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서론만 읽었을 때는 잘 구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그 서론을 비교하면서 읽거나 서론보다 좀 더 길게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좀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다른지 바울이 어떻게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지 편지의 서론을 구성하는 요소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요소입니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인사말입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다르게 시작하는 요소는 보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

1절 마지막에 “바울은” 이라고 나오는데,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단순하게 바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길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의 긴 문장을 간단하게 말하면 바울 자신이 사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이중 부정과 이중 긍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두 번의 부정이 나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의 긍정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두 번의 부정과 두 번의 긍정을 구분하는 것이 가운데 있는 “오직”이라는 접속사입니다. 우리말로 ‘오직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니까 오해하기 쉬운데, 여기 ‘오직은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뜻은 ‘그러나’입니다. 그래서 1절의 표현은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택하셨고, 때가 되어 바울을 부르셔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사도됨은 사도행전 9장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대적했던 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됨에 대해서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적극 변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바울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도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결국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 서론에서 보내는 사람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사도됨을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게 생긴 어려움이 이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보내는 사람을 길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2절에도 보내는 사람이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라고 기록합니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단순히 바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편지를 쓰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럼 이 부분은 바울이 어떤 면에서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 걸까요? 바울은 편지를 보내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자주 언급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보면 바울과 동역했던 사람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별로 다르게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통,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경우에 그 이름을 명시하면서 몇몇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다수가 편지 보내는 사람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다른 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다르게 시작하면서 자신이 편지에서 전하는 말들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편지의 내용은 많은 형제들이 함께 하는 것으로 그들이 동의하고 공유하고 있는 내용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보내는 사람’을 통해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이 전하는 내용도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형제들이 인정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편지의 권위와 그가 전하는 말의 무게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무겁고 진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요소인 보내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봤고, 이어서 두 번째로 살펴볼 다르게 시작하는 요소는 받는 사람입니다. 2절을 보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는 뭘 다르게 시작했는지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것은 받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성도’라는 표현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런 기본적인 표현조차도 없습니다. 만약 편지가 아니라 직접 바울이 말하는 것으로 상상해본다면 지금 바울의 이 표현은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감이 있고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불편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과 바울이 그 문제를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불편한 마음은 인사말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세 번째로 살펴볼 다르게 시작하는 요소는 ‘인사말’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어줍니다. 바울의 이러한 인사말은 일반적입니다.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점은 인사말보다 이 인사말에 없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의 인사말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심지어 문제 많은 교회,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그러한 감사의 인사가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불편하고 다급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는 바울의 생각과 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편지를 다르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그의 편지를 다르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럼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복음’의 문제입니다. 6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복음의 문제,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 바울의 편지를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르게 시작하는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나도 복음을 믿고 있는데 내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복음, 내가 따르는 복음에 대해서 난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제대로 믿고 있는지, 난 복음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시작을 가져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다르게 시작합니다. 복음이 그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다르게 시작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복음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다시 복음을 마음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 놀라운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4)

이 복음이 우리에게 다른 시작을 주었습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신약에서 가장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조작전을 계획하셨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둘째는 우리의 상태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 빠져있던 상태였습니다. 구조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스스로 나올 수 없었고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뜻을 따라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셋째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생당하신 것은 뜻하지 않게 벌어진 사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안타까운 일들처럼, 원치 않았지만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 일에 예수님이 희생양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단순히 실패에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다시 노력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 정도를 열어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위로하는 것,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시작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물에 빠진 자에게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수영을 하는지 직접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져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복음은 사람들이 만든 종교와 다릅니다. 뭔가를 배워서 뭔가를 보고 따라함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아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곳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같은 장소에 삽니다. 건짐 받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악한 세대와 구별된 삶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다른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건짐 받은 자로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살지만 이제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비록, 복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같은 장소를 다르게 살도록 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른 마음으로, 다른 가치관으로, 다른 생각으로, 다른 꿈을 꾸며 삽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생명으로 우리가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세상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치르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참된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일을 계획하셨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주셨고,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일,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그런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생각할 때,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바울이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서론을 통해 복음에 대해서, 내가 믿고 있는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진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하시고 그 가치를 되새기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 뭐 다 아는 내용인데’,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거지’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그 생각을 바꾸십시오.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다시 하나님 말씀 앞에 나아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복음으로 나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길 원합니다. 복음으로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우리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하며 놀라운 소망을 가진 자로서 오늘을 힘 있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복음의 역사가 계속해서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삶이 복음으로 계속해서 변화되어 더 주님을 닮아가고 누군가가 복음을 깨달아 삶을 돌이키고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계속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금 복음을 되새며 복음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한 번의 새해를 맞으며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며 그동안 부족했던 것들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새해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까? 올 한해를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계획과 목표 가운데 복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복음을 내가 어떻게 살아낼까? 나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를 내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다시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으로 힘을 얻어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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