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구 보리 하화 중생 - sang-gu boli hahwa jungsaeng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불교개념용어

 위로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보살의 수행 목표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측면으로 표현한 불교교리.   

정의

위로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보살의 수행 목표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측면으로 표현한 불교교리.

연원 및 변천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 역시 변모되었다. 대승불교도들은 기존의 불교 수행자를 성문(聲聞) 및 연각(緣覺)으로 지칭하고, 자신들을 보살로 칭하였다. 보살은, 범어로는 bodhi-sattva이고 팔리어로는 bodhi-satta이며, 이를 한역해서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한다. 이 중 보리는 지혜, 깨달음, 도(道) 등을 의미하고, 살타는 중생을 뜻한다. 그리고 보리살타를 줄여 보살이라고 한다.

내용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바로 이 보살 수행자가 발심해서 수행하는 목적을 상(上)·하(下)라는 방향성에 근거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보살은 위로는 불교의 지혜인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고통 받는 다양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두 가지 이익, 곧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각각 대응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성문·연각·보살을 삼승(三乘), 곧 불교를 수행하는 세 부류의 수행자로 보았는데, 이 가운데 성문·연각을 이승(二乘)으로 칭한다. 반면 보살은 앞의 두 부류와 결정적으로 다른 수행자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하화중생에 있다. 앞의 두 부류가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반면, 보살은 깨달음과 더불어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함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위로 보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은 지혜이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자비이다. 성문·연각은 지혜 하나만 갖춘 반면, 보살은 지혜와 자비의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이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런 점에 의거하여 성문·연각보다 보살을 더욱 훌륭한 수행자로 간주한다.

문구의 측면에서 보면, 동아시아에서 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는 표현이 정형화된 것은 9세기 이후로 보인다. 그 이전의 한문 불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뜻은 같지만 표현이 조금씩 다른 문구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 불교는 대부분 대승불교를 표방해왔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인 보살이 매우 중시되었고, 보살의 수행 목표인 상구보리하화중생 역시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신라의 원효는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대승기신론』을 지은 대의가 보살의 두 가지 목표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평했을 만큼 이 두 가지 목표는 중요성을 가진다. 두 가지 가운데 특히 하화중생은 불교가 사회의 대중 속에서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유도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집필자

집필 (2016년)박인석(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불자입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 중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이 가르침을 우리가 사는 현대 시대에 어떻게 적용하면 좋은 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열심히 수행정진하며 중생교화

대승불교 ‘자리이타 정신’ 표현

흔히 우리 주변에서는 대승적 입장, 대승적 견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보다 넓게 보고 넓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대승(大乘)은 물론 불교의 대승입니다. 새로운 불교 개혁운동의 이념인 대승은 신분이나 지식의 유무(有無), 인종이나 남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피안(彼岸)의 언덕으로 건네주는 큰 불교의 가르침이자 위없는 가르침, 보편적 진리를 지향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질문하신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堤 下化衆生)’은 대승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위로는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바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참된 지혜와 자비의 삶을 이끄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위와 아래라는 뜻은 선후(先後)의 의미보다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라는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그래서 불교 학자들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중생구제가 강조되면서 등장했던 대승불교의 자리이타의 정신, 즉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얘기합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그 주체인 보살의 의미입니다. 보살은 진리의 길로 들어서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자 성불(成佛)의 길로 들어선 자각적 존재입니다. 보디삿트바, 보리살타(普堤薩陀)의 줄임말인 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중생이란 뜻인데 원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의 구도자였을 때의 모습을 표현한 말입니다. 말하자면 장차 깨달음을 이룰 중생이란 뜻이 강하게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의미를 새긴다면, 장차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이 바로 보살이며 더 나아가 우리들이 모두 보살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특히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누구나가 스스로 보살임을 자각하고 보살행을 닦을 것을 강조합니다. 불자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저는 상구보리는 자기 안으로, 하화중생은 자기 밖으로 향하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구하고 그 진리를 이웃과 공유(共有)하는 것, 다시 말해서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삶이 일치될 때 진정한 깨달음은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불자들은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르침을 믿고 수행하면서 이웃의 불행과 고통을 가슴에 지니며 정진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해 봅니다. 세상을 살면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어디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자 수행하는 것이 상구보리입니다. 또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어디에도 잘 쓰이는 사람이 되고 이웃들에게도 보탬이 되는 것을 하화중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일반 대중들로부터 멀어지면 그것은 종교의 본래 목적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명(無明)에 쌓여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내세운 종교입니다. 그렇게 일반 대중에게 돌아간 불교가 대승의 불교이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을 실현한 불교입니다. 각자의 삶속에서 자신이 하는 일과 이웃을 위한 자비의 마음을 일치시켜 나가는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서울 정혜사 주지

[불교신문 2329호/ 5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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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보살 반가사유상 국보 제63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대승보살의 좌우명이자 보살의 실존가치가 되는 불후의 명구다. 불교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보다 존재론을 바탕으로 인식론적 입장을 취해 실천론으로 나아가야 그 의미가 각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촉진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대승불교의 교육이념이자 보살의 도이다. ‘보살의 행’을 힘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기를 부처님께 가까이 하는 길이요 한편으로는 많은 범부를 자기와 같은 길로 이끌어 들이는 공덕을 쌓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 곧 위로는 깨달음(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근기가 낮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그와 더불어 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 역시 변모했다. 대승불교도들은 기존 불교수행자를 성문(聲聞) 혹은 연각(緣覺)으로 지칭하고, 자신들을 보살로 칭했다.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로는 bodhi-sattva이고 빠알리어로는 bodhi-satta이며, 이를 한역해서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했다. 이는 보디(Bodhi)와 사트바(sattv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리고 보리살타를 줄여 보살이라고 했다.

    보디(Bodhi)는 보리(菩提) 즉 깨달음을 의미 하며, 사트바(sattva-살타)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으로 각유정(覺有情), 대사(大士), 고사(高士) 등으로 의역되기도 하며, 부처(깨달은 사람 또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보살 즉 각유정이란 뜻 속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깨친 중생,

    둘째는 깨치게 하는 중생,

    세 번째는 깨칠 중생이 그것이다.

    즉, 중생은 중생이로되 이미 불법의 진리를 깨친 중생이고, 중생으로 하여금 깨치도록 유도하는 중생, 그리고 그와 같은 보살과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깨치게 될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다.

    보살은 대승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위로는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 하면서[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하화중생(下化衆生)] 역할을 하는 일종의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습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은 바로 이 보살 수행자가 발심해서 수행하는 목적을 상(上)ㆍ하(下)라는 방향성에 근거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보살은 위로는 불교의 지혜인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고통 받는 다양한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두 가지 이익, 곧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각각 대응된다. 누구나 보살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고, 이러한 보살수행의 핵심은 이타행을 통한 중생구제에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상구보리는 자리행(自利行)을, 하화중생으로 이타행(利他行)을 행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보살행을 하는 것은 불자들의 이상이라고 할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성문ㆍ연각ㆍ보살을 삼승(三乘)이라 해서, 불교를 수행하는 수행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성문과 연각을 이승(二乘)으로 칭한다. 반면 보살은 앞의 두 부류와 결정적으로 다른 수행자로 분류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하화중생에 있다.

    앞의 두 부류가 자신의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반면, 보살은 깨달음과 더불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일을 함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위로 보리를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지혜이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자비이다.

    성문ㆍ연각은 지혜 하나만 갖춘 반면, 보살은 지혜와 자비의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이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런 점에 의거해 성문ㆍ연각보다 보살을 더욱 훌륭한 수행자로 간주한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며, 그 열반은 나만의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들이 화탕지옥(火湯地獄)과 같은 세상에서 무진장(無盡藏)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선방에 앉아 나 홀로 정진하며 평안하면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중 서원(誓願)과 회향(回向) 즉,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과 자신이 쌓은 선근공덕을 남에게 돌린다는 회향을 핵심개념으로 보는 것도 역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건네는 뱃사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된다.

    상구보리가 먼저냐 하화중생이 먼저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불자도 있고, 자신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가 어찌 중생을 교화하느냐 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리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을 것 같다. 부처님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진정한 보리심(지혜를 구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마땅히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자로서는 꾸준히 무상과 무아의 깨달음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면서도 고통 받는 중생 구제를 위해 자비행을 실천하고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해서 자신이 깨친 지혜를 가지고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세친(世親, Vasubandhu)은 <불성론(佛性論)>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애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어나게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범부의 집착은 버리고, 큰 자비로 말미암아 이승(二乘)의 집착을 버린다.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지혜로 말미암아 불법을 이루며, 큰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을 성숙하게 한다.”라고 했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집착과 삼독의 원인인 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만,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로 말미암아 중생에 대한 사랑은 늘 솟아나게 한다. 범부가 갖는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므로 이를 지멸(止滅)하지만, 큰 자비가 있기에 이승(二乘)만을 방편으로 삼는 집착 또한 버린다. 열반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없애야 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열반에 이르려는 마음 또한 욕망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는 방편으로서 삼독(三毒)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기에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 불법을 이루려 하지만, 자비가 있기에 설혹 불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을 깨닫게 하는 일에 머문다.

    <유마경(維摩經)>의 ‘문수사리의 병문안품’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부터 저의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이 아프다면, 저 역시 아픕니다. …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아픈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보살이 아픈 것은 큰 자비[大悲]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아픔의 원인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 그리고 대비(大悲) 때문이다. 중생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 인해 병을 얻지만, 보살은 중생의 아픔에 대한 대비 때문에 병이 생긴다. 보살은 중생이 아프면, 보살은 외아들처럼 중생을 사랑하기에 마치 자신의 외아들이 아픈 것과 같이 아프다. 이 아픔 때문에 열반에 이르렀어도 이를 미루고 생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병이 나아야 자신도 모든 아픔에서 벗어난다.

    <유마경>에 보살에 대해 '중생이 병들어 보살이 앓는다'는 말처럼 보살은 중생들과 한몸으로 생각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으로 대자비심(大慈悲心)를 펼치는 분들이다. 이외에도 보살의 행(行)에는 사무량심(四無量心), 사섭법(四攝法),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표현이 정형화된 것은 9세기 이후로 본다. 그 이전의 한문 불전에서는 이와 관련해 뜻은 같지만 표현이 조금씩 다른 문구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부분 대승불교를 표방해왔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인 보살이 매우 중시됐고, 보살의 수행 목표인 상구보리 하화중생 역시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됐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대승기신론>을 지은 대의가 보살의 두 가지 목표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평했을 만큼 이 두 가지 목표는 중요성을 가진다. 두 가지 가운데 특히 ‘하화중생’은 불교가 사회의 대중 속에서 실현돼야 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유도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원효는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을 폈다.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깨달음이란 원래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어떤 계기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을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 깨달아 부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에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고통과 무명 속에 있는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그 순간에 나 또한 열반에 이르러 진정 해탈하게 된다.

    중생이 고통 속에 있는 한, 설령 깨달았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해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나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고 그를 위해 그쪽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6년 동안 모진 고행을 하신 부처님이 어느 날 아침 보리수 나무아래서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무한대의 시 공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따로 없다는 것을, 오고 가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모든 중생들이 세세생생(世世生生) 거듭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며,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열반(涅槃)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은 그 깨달음의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 하지 않고, 무한한 열락의 자리인 보리수나무를 박차고 나와 고통의 현장인 속세로 나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이다.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이 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 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홀히 한다면 진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요원 해지게 된다.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두 가지 수레바퀴로 나아갈 때, 우리는 불국토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상구보리가 곧 하화중생이 돼야 하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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