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소설 - salangbang sonnimgwa eomeoni soseol

 <사랑손님과 어머니>

【해설】

   주요섭의 단편소설. 1935년 [조광(朝光)]지에 발표. 여섯 살 난 어린아이의 독백을 통해 과부인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과의 미묘한 애정심리를 서술하고 있다.

   이 작가가 초기의 신경향파 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주의적인 세계에 접근한 첫 번째 작품으로서 예술적인 향취가 풍기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사랑과 좌절을 그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연정(戀情)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사랑의 좌절이 윤리적인 모럴에서 오는 갈등을 다룬 이 작품은 예술의 본원적인 영역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여섯 살 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과부인 젊은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과의 미묘한 애정 심리가 전달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성공적으로 사용된 작품으로서 시점이 소설의 다른 요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문학적 장치임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아저씨 사이의 연정과 갈등을 섬세하게 나타낸 소설로, 통속적인 내용을 어린아이의 맑고 깨끗한 눈으로 순수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천진난만한 '나'의 행동이 두 어른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며, 어른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어렴풋한 그리움과 망설임을 어린아이다운 감각과 직관으로 선명하게 포착하는 등 아이의 시선을 절묘하게 활용한 소설이다. 물론, 화자가 어린 여자애이기 때문에 서술과 묘사가 표면적이고 즉물적(卽物的)인 선에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불충분함이 이 소설의 예술성을 극대화한다.

   즉, 이 작품의 기법은 '분명히 드러내기'보다는 '의미의 감추기'가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머니와 사랑손님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장면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한다든지, 지연(遲延) 효과를 노린다든지 하는 것들은 해당 장면이 암시하는 의미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고도의 예술적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개관】

▶종류 : 단편소설, 순수소설, 예술소설, 애정소설, 심리소설, 본격소설, 현대 소설

▶문체 : 경어체, 구어체, 섬세한 여성적 문체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이 소설의 시점 설정은 특이한 점이 있다. 여섯 살 난 여자아이의 티없이 맑은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독특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지니는 순수성, 여성적인 섬세함 등도 이 시점의 설정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성 : 순행적 구성(평면적 구성)

▶표현 : 인간 심리의 사실적 묘사

▶성격 : 인간주의적, 사실주의적, 서정적, 심리적, 사실적, 낭만적

▶배경 : 1930년대, 시골 읍

▶경향 : 서정적

▶제재 : 사랑손님, 어머니의 사랑

▶주제 

- 기존 윤리와 본능적 사랑 사이의 갈등

- 애정과 기존 인습(봉건적 윤리관) 사이의 갈등

- 인간과 인간(남녀)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과 관심

▶출전 : 월간지 [조광(朝光)](1935. 11월호)

【등장 인물】

▶나(박옥희) : 서술자이며 관찰자. 여섯 살 난 어린 소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전형적인 어린이, 직선적 성격. 어머니와 아저씨와의 애정을 티없이 맑은 눈으로 바라본다.

▶어머니 : 봉건적 인습의 굴레로 사랑을 버리는 전형적 한국 여인(24세). 과부. 한국적 여인, 자상한 어머니, 현숙하고 다정다감한 여인, 인내심이 강한 여인, 일부종신(一夫終身)하는 여인. 젊은 과부로 사랑손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 아이에 대한 사랑, 당대(當代)의 풍습과 세인의 이목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끝내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인.

▶사랑손님(아저씨) : 옥희네 사랑에 세든 교사. 조금은 소극적 성격, 격렬한 행동ㆍ열정ㆍ갈등을 드러내지 않는 온건한 성격. 옥희 아버지의 옛 친구로, 사랑에 하숙을 든다. 옥희 어머니에게 연정을 갖지만 얼마 후 집을 떠난다.

▶외삼촌 : 부수적 인물. 솔직, 활달, 진보적 성격

【특징】

  (1) 손님과 어머니의 미묘한 애정 심리를 여섯 살 순진한 어린이의 눈과 입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2) 인물 성격의 간접 묘사 :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행동, 대사)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격,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3) 특별한 사건 없이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따라 연정을 서술하고 있다.

  (4) 현실과 규범 사이의 갈등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5) 주동 인물(손님, 어머니)만 등장하고 있다.

  (6) 인물 간의 심리가 섬세하게 그려졌다.

  (7) 아이가 어른들에게 이야기하는 구화(口話) 형식을 취하고 있다.

  (8) 섬세한 여성적 문체의 경어체를 사용하였다.

  (9) 작중화자의 주관적 관찰과 등장인물의 객관적 외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0) 전통적 봉건 윤리 의식과 애정 심리가 빚는 갈등을 잘 묘사하였다.

【이 소설의 특이한 효과】

▶어른들의 감정 세계를 이해할 수 없어 오히려 편견 없는 순진한 시선으로 견문한 대로 표현해서 독자에게 진실성이 진하게 전달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객관적 사실, 모습만 전달되므로 독자는 가능한 온갖 상상을 하면서 즐거움을 맛보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주요사건】

  (1) 옥희네 사랑채에서 하숙하게 되는 아저씨

  (2) 첫날부터 아주 잘 해주는 아저씨가 좋은 옥희

  (3) 삶은 달걀이 좋다고 하는 옥희의 말을 이어 받아 삶은 달걀을 반찬으로 내어 달라고 하는 아저씨(옥희는 더욱 좋아하게 됨)

  (4) 어느 날 어머니를 놀라게 해 준다고 벽장 속에 숨었다가 그만 잠이 들게 되어 화나게 만든다.

  (5)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유치원에서 선생님 책상 위에 꽂혀 있는 빨간 꽃을 몰래 빼다가 어머니에게 주면서, 사랑 아저씨가 엄마 갖다 주라고 했다며 거짓말을 한다.

  (6)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런 걸 받아 오면 안 된다고 화를 냈다.

  (7) 어머니는 오히려 버리지 않고 풍금 위에 놓아둔다.

  (8) 옥희가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 순간, 소복(素服)을 입고 달빛을 받으며 풍금을 타고 있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린다.

  (9) 어머니의 말 "옥희야 너 하나문 그 뿐이다."

  (10) 어느 날 아저씨가 밥값 봉투를 옥희에게 건네 주라고 하자, 어머니는 봉투를 받고 몹시 당황하면서 봉투를 연다. (꽃을 받았을 때보다 더욱 당황한다.)

  (11) 그날 밤 어머니는 장농 문을 열고 아버지의 옷을 꺼내 놓고 옥희와 함께 기도한다.

  (12) 어머니는 어떤 때는 매우 즐거워 하다가 금새 풀이 죽고 우울해지는데 그 이유를 옥희는 궁금해 한다.

  (13) 그럭저럭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저씨는 짐을 꾸려 하숙을 나간다.

  (14) 기차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어머니는 하염없이 그 쪽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책갈피 속에 끼워 놓은 꽃송이를 옥희 더러 버리라고 한다.

【구성 1】

▶발단 : 어머니와 '나'가 살고 있는 집에 아저씨가 하숙을 든다.

▶전개 : '나'는 아저씨와 친해진다. 좋은 반찬과 달걀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위기 : 어머니에게 아저씨는 관심을 가지지만 어머니는 항상 떨리는 모습이다.

▶절정 : '나'가 거짓말로 준 꽃으로 인해 어머니는 마음이 흔들린다.

▶결말 :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아저씨는 떠나고, 어머니는 마른 꽃을 '나'에게 주며 갖다 버리라고 한다.

【구성 2】

▶발단 : 나는 여섯 살 난 처녀애다. 우리집은 세 식구가 산다. 스물네 살 난 과수댁인 우리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외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 우리집에 어느 날 낯선 손님이 나타난다. 그 아저씨는 큰외삼촌의 친구이며 죽은 우리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우리 동네 교사로 부임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 하숙할 곳이 적당치 않아 우리집 사랑채에다 하숙을 정하게 되었다.

▶전개 : 나는 그 사랑방 손님이 좋았다. 첫날부터 내게 고맙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내가 점심을 먹고 사랑에 나가보니, 아저씨는 그때야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에게 어떤 반찬을 좋아하느냐고 묻길래 삶은 달걀이라고 하자 삶은 달걀을 내게 집어 주었다. 내가 되묻자 아저씨도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말한 후부터 나는 달걀을 실컷 먹게 되었다. 나는 윗간에 풍금이 있는 것이 생각나 어머니와 함께 가 풍금 좀 타 달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아버지 생각이 나는지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그냥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위기 : 나는 거의 매일 아저씨 방에 놀러갔고 아저씨는 나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것저것을 귀찮을 정도로 물어 본다. 어머니는 내가 아저씨에게 가는 것을 말리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새 저고리를 내 주기도 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아저씨가 뒷동산에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아저씨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이튿날 어머니와 함께 예배당에 가 기도를 드리는데 남자석에 아저씨가 있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에게 아저씨가 왔다고 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하루는 내가 유치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없어서 벽장 속에 숨어 잠이 들었는데, 온 집안이 나를 찾아 야단법석을 떨었다.

▶절정 : 내가 이 일에 대해 미안한 마음으로 유치원에서 몰래 꽃 한 송이를 가져와, 아저씨가 준 것이라고 하며 어머니에게 드렸다. 꽃을 버릴 것 같던 어머니가 그 꽃을 풍금 위의 꽃병에 꽂아 두었고 그날 밤 풍금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가 밥값이라며 준 봉투 속에 네모로 접은 종이를 보자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해 했다. 그 날 밤 나는 밤중에 깨어 어머니와 함께 기도를 하는데, 어머니는 ‘시험에 들지 말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말 : 어느 날 사랑방에 나가니 아저씨가 짐을 꾸리고 있었다. 아저씨가 떠나는 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정거장이 보이는 언덕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는 내가 옛날에 주었던 꽃송이를 버리라고 한다.

【줄거리】

   『홀로 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우리 집'에 생전에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아저씨가 하숙을 하게 된다. 아저씨는 이 동리 학교 선생님으로 온 것이다.

   아버지가 쓰던 사랑에 기거하게 된 아저씨는 '나'와 금방 친해진다. 아버지 없는 '나'로서는 아저씨가 아버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어느 날, 아저씨에게 불쑥 그 말을 꺼냈더니 아저씨는 까닭 없이 얼굴을 붉히며 '못쓴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몹시 떨리었다. 또,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유치원에서 살짝 뽑아 온 꽃을 아저씨가 갖다 주라고 하였다며 어머니에게 주었을 때 어머니도 얼굴이 빨개진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달빛 속에서 아버지의 옷을 장롱 속에서 꺼내 보고 있었다. 아저씨나 어머니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으나 모두 깊은 시름에 빠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가 종이가 든 아저씨 손수건을 '나'를 통하여 전한 며칠 뒤 아저씨는 예쁜 인형을 '나'에게 주고 영영 집을 떠나 버린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뒷동산으로 올라가 아저씨가 탔을 기차를 멀리 바라본다. 요즈음 어머니가 가끔 치시던 풍금 뚜껑은 다시 닫히고 찬송가 책갈피에 끼워 있던 마른 꽃송이도 버려진다. 매일 사던 달걀도 이젠 사지 않게 되었다.』

   『어느 마을에 스물네 살의 젊은 과부가 딸 옥희와 살고 있다. 옥희는 여섯 살 난 여자애다. 옥희 아버지는 옥희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남긴 딸과 어머니의 삯바느질 등으로 옥희네는 아쉬운 대로 밥걱정은 안하면서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 친구라는 아저씨 한 사람이 옥희 집 사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큰외삼촌의 친구이기도 한데, 이 마을 학교 교사로 왔다고 했다. 아저씨는 옥희에게 친절하게 대해 줄 뿐만 아니라, 옥희를 통해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어린 옥희는 그런 아저씨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어머니는 아저씨와 얼굴도 마주치려 하지 아노지만, 옥희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이런 가운데 옥희는 자기도 모르데 두 사람의 마음을 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유치원에서 가져온 꽃을 아저씨가 주었다고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옥희는 아저씨가 밥값이라고 준 봉투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는데, 거기에는 돈 말고도 무슨 종이 같은 게 들어있었다. 그 종이를 읽은 어머니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개졌다 한다. 옥희의 뺨에 일을 맞춰 주는 어머니의 입술은 불에 달군 듯 뜨거웠다. 얼마 뒤 어머니는 옥희를 안고, “엄마는 옥희 하나면 그뿐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고, 그날 저녁 곱게 다린 손수건을 아저씨에게 갖다 주라고 한다. 옥희는 그 손수건에 뭔가 들었다고 생각한다.

   손수건을 받고 며칠 뒤 아저씨는 옥희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기운 하나 없이 새파래진 얼굴이었다.』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입니다.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외삼촌 이렇게 세 식구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한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하고 결혼한 지는 일 년 만이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가 먹을 것을 남겨놓고 가셨답니다.

   큰외삼촌이 웬 낯선 사람 하나와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낯선 손님이 사랑방에 계시게 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즐거워졌습니다.

   어느 날 사랑에 나가 보니까 아저씨는 점심을 잡수시고 있었습니다. 아저씨에게 무슨 반찬이 제일 맛있으시냐고 물었더니 삶은 달걀이라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그 말을 알렸습니다. 사랑 아저씨가 달걀을 좋아하는 것이 내게는 썩 좋게 되었습니다. 다음부터 어머니는 달걀을 많이 사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저씨하고 내가 뒷동산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유치원 친구는 “아버지하고 어디 갔다 오는구나” 하였습니다. 내가 아저씨한테 아버지가 되어 달랬더니 아저씨는 얼굴이 빨개지셨습니다. 유치원에서 꽃을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주면서 갑자기 멋적어서 “사랑방 아저씨가 갖다 주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도 빨개졌습니다.

   며칠 뒤 아저씨가 하얀 봉투를 밥값이라고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받더니 얼굴이 발갛게 물들며 손이 파들파들 떨렸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네모를 접힌 하얀 종이가 잡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로 다린 하얀 손수건을 아저씨께 갖다 드리라고 합니다. 손수건을 받는데 아저씨는 웬 일인지 얼굴이 몹시 파래졌습니다. 여러 밤을 자고 난 어떤 날 오후에 나는 어머니에게 아저씨가 기차 타고 멀리 간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뒷동산에 올라갔습니다. 기차가 저편 산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어머니는 가만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달걀 장수 노파가 달걀 광주리를 이고 들어와서 달걀을 어머니에게 사라고 권하였지만 어머니는 이제 달걀 먹을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사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아저씨가 주신 인형 귀에다 대고는 우리 어머니가 거짓말을 썩 잘 하는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외삼촌은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집에는 끼니 때 외에는 별로 붙어 있지를 않아 어떤 때는 한 주일씩 가도 외삼촌 코빼기도 못 보는 때가 많으니까요. 깜박 잊어버리기도 예사지요.

   옥희네 집에는 세 식구가 산다. 한 사람은 스물네 살 난 과수댁인 옥희 어머니이고, 또 한 사람은 중학교에 다니는 외삼촌이다. 그런 옥희네 집에 낯선 손님이 나타난다. 그는 큰외삼촌의 친구이고 죽은 옥희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데, 옥희네 동네의 교사로 부임해와, 마침 하숙할 곳이 적당하지 않아서 옥희네 사랑채에 들게 된 것이다. 옥희는 그 사랑방 손님이 좋다. 어느 날 옥희가 점심을 먹고 사랑에 나가보니 아저씨가 점심을 먹고 있다. 그는 옥희는 어떤 반찬을 제일 좋아하누? 하고 묻는다. 옥희는 삶은 달걀이 좋다고 한다. 그러자 아저씨도 삶은 달걀이 제일 좋다고 한다. 옥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안방으로 뛰어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 후 옥희는 매일 좋아하는 달걀을 먹게 된다.

   그러던 어느, 옥희는 어머니를 놀라게 해주려고 벽장 속에 숨었다가 그만 잠이 든다. 집안에서는 옥희를 찾아 야단이 난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옥희는 어머니에게 좀 좋은 일을 해주고 싶어서 유치원 선생님 책상 위에 꽂힌 빨간 꽃을 가져다 어머니에게 준다. 어머니가 그 꽃은 어디서 났니?  퍽 곱구나 하고 묻자, 옥희는 엉겁결에 사랑아저씨가 엄마 갖다주라고 줬다고 대답해버린다.

   엄마의 반응은 아주 예상 밖으로 나타나, 몹시 놀라며 그런 걸 받아오면 안 된다고 야단친다.  어머니의 표정으로 보아 옥희는 그 꽃이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꽃병에 꽂아서 풍금 위에 놓아둔다. 그 날 밤 옥희는 사랑방에 나가 아저씨 무릎 위에서 논다.  그런데 문득 풍금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이다. 옥희는 안방으로 뛰어가 본다. 거기에는 소복을 하고 달빛을 받으며 풍금을 타는 어머니가 있는데 두 뺨에선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딸을 보고 말한다.  옥희야! 너 하나면 그뿐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아저씨는 어머니에게 전하라고 옥희에게 봉투를 준다. 그것을 받은 어머니는 몹시 당황하며 봉투를 연다. 거기에는 밥값과 함께 종이쪽지가 들어 이다. 그날 밤 옥희는 밤중에 깨어나, 어머니가 아버지 옷을 꺼내놓고 앉아 있는 것을 본다. 어머니는 옥희와 함께 기도하다가, 시험에 들지 말게......시험에 들지 말게.....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후 어머니는 어떤 때는 매우 즐거워하다가 금세 풀이 죽어 우울해하곤 한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옥희는 아저씨가 짐을 꾸리는 것을 본다. 어머니는 옥희와 함께 언덕에 올라가, 아저씨가 탄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송이를 버리라 준다.

   그래서 아저씨가 주신 인형의 귀에다가 내 입을 갖다대고 가만히 속삭이었습니다.

   "얘, 우리 엄마가 거짓부리를 썩 잘 하누나. 내가 달걀 좋아하는 줄 잘 알문성 생 먹을 사람이 없대누나. 떼를 좀 쓰구 싶다만 저 우리 엄마 얼굴을 좀 봐라. 어쩌면 저리두 새파래졌을까? 아마 어데가 아픈가 보다."

라고요.』

【감상】

   한 50여 년 전쯤엔 어땠을까. 그때 아이들은 지금 아이들보다도 어수룩한 데가 있어서 자기가 ‘사랑의 우체부‘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짐작도 못할 것 같다. 아이를 통해 은근히 자기 마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겠지. 이럴 때 아이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 소설은 여섯 살 난 계집아이의 눈에 비친 애달픈 사랑이야기다. 물론 꾸며진 이야기겠지만, 그 시절에 어디선가 있음직한 이야기다. 아니,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머니, 옥희, 사랑방에 하숙하는 아저씨, 작은외삼촌 등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옥희가 말하듯이 씌어 있다. 바로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 친구 사이를 오가며 ‘사랑의 우체부’ 노릇도 하고, 순수한 눈으로 ‘사랑의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이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제 이름은 박옥희구요. 우리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옥희라는 여섯 살짜리 아이가 이 이야기를 실제 들려주듯 느끼게 된다. 옥희는 소설 속의 이야기꾼, 즉 화자(話者)인 셈이다. 그렇다고 옥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 소설 속에서 옥희는 관찰자인 것이다. 그래서 ‘나’가 이야기하고 있으나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닐 때 흔히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가일까? 그건 더욱 말도 안된다. 옥희라는 여섯 살 난 여자애와 주요섭이란 소설가는 다른 인물이다. 소설의 화자는 소설가와 다르다.

   아무튼 이 소설의 내용은 남편을 잃고 딸과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 여인과 그 남편의 친구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인습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애달픈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아이의 눈에 비니는 대로 전개되면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더 애틋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만일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어머니가 이야기하듯 전개해 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 담겨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만일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또 내 딸 옥희는 자라면서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어머니가 화자(話者)가 된다면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낼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자기가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데 죄의식을 갖고 있다. 아저씨가 화자가 된다 해도 감정을 직접 드러내긴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 흥흥거리기 잘하는 외삼촌이 이 소설의 화자가 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마음이나 고민은 하잘것없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일관되고 있다. 이 같은 제한적인 시점의 활용은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습과 사랑과의 갈등이라는 다소 무거운 제재를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데 무리 없는 효과를 얻게 해 준다. 또한 그 같은 제재가 동화적 눈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암시성 짙은 내용과 보다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나레이션(해설) 역시 어린 소녀의 말로 일관함으로써 순수한 사랑의 고뇌임을 호소하게 한다. 특히 어머니와 사랑손님과의 연정(戀情)이 동화적 눈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은 그만큼 독특한 향취를 누리게 한다. 그러한 특징 때문에 이 작품이 보다 정서 취향의 성격을 강하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같은 시각의 제한적인 구도는 서정성을 담으면서도 그 밖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독자의 판단에 맡김으로써 발생하는 장치에 불과하지만, 엄밀한 객관성 때문에 그 극적 효과는 보다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여느 소설과는 달리 1인칭을 주조로 한 주관적 소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데 이 소설은 큰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통념상 단편소설이 객관적인 시점을 통해서 형상화된다는 점을 벗어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 흔히 빠지게 되는 감상과 같은 결함 요소를 극복하고, 짙은 서정성을 담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동심의 눈을 통해 젊은 과부(寡婦)와 남편의 옛 친구 사이의 미묘한 연정과 심리적 갈등 을 선명하게 부각시킴 작품이다. 어린 소녀(나)를 관찰자 역할로 맡김으로써 자칫 빠지기 쉬운 통속적 사랑을 신선한 각도에서 보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그가 신경향파 문학에서 벗어나 발표한 작품으로 <아네모네 마담>, <추물> 등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옥희라는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과부인 어머니와 사랑손님과의 사랑, 미묘한 애정 심리를 기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시각을 사용하여 참신하고, 산뜻한 미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사랑과 윤리, 즉 기존 관습과 마음 속 사랑의 갈등이라는 평범한 주제를 섬세한 심리 묘사와 순박한 화법으로 서술하여 성공을 거둔 것은 아마 이런 시점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평자들은 이 작품을 1인칭 관찰자 시점의 표본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은 화자가 어린아이이므로 서술의 대상과 범위가 제한되어 사상과 주제 의식을 담기가 어렵다.

   흔히 이런 시점을 '신빙성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고 하는데, 신빙성 없는 화자란 등장인물 중 하나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그의 미성숙 내지는 무교양으로 인해 사건을 잘못 파악, 서술하기 때문에 독자가 전체 상황을 수집하여 올바른 판단을 해야하는 경우의 화자를 말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화자가 당연히 몰라야 할 상황에서 "모르겠다."라는 화자의 말을 자주 사용하여 은연 중에 작품에 개입하면서 예술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옥희가 말하듯이 쓰여져 있다. 바로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 친구 사이를 오가며 ‘사랑의 우체부’ 노릇도 하고 순수한 눈으로 ‘사랑의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옥희는 소설 속의 이야기꾼, 즉 화자(話者)인 것이다. 그렇다고 옥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다.

   남편을 잃고 딸과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 여인과 그 남편의 친구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인습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애달픈 사랑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가 아이의 눈에 비치는 대로 전개되면서 글을 읽는 사람들은 더 애틋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옥희가 화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두 주인공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 편지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점이 이 작품을 한층 더 순수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편, 옥희는 화자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감정을 이어주는 고리가 되고 있다. 아저씨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는 걸 어머니에게 전한 것도 옥희였다. 이 말을 듣고 어머니는 아저씨 밥상에 삶은 달걀을 놓는다. 옥희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라든가, ‘이 꽃 아저씨가 엄마 갖다 주라고 줬어’라는 이야기로 두 사람의 마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옥희의 눈을 통해 한 단계 걸러진 두 사람의 마음을 본다. 직접 두 사람의 사랑을 보는 것도 아니고, 오고 간 편지 사연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른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소설에서 이야기를 누구의 입장에서 어떤 각도로 서술해 나가는가 하는 문제를 시점(視點-point of view)이라고 한다. 즉 서술의 각도, 설화자의 위치를 시점이라 부른다. 이 소설은 여섯 살 난 어린 계집아이의 눈에 비친 사건을 서술해 나가는 독특한 시점을 취하고 있다. 인간의 세상살이나 다양하고 미묘한 인간 심리에 대하여 전연 모르고 있는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가 구김살 없는 어린이의 어법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작중 화자인 ‘나(옥희)’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와 사랑손님 사이의 미묘한 관계 속에 깊이 연루되어 사건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나’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번민하는 모습과 아저씨를 의식하는 심리적 추이가 신선하고 깨끗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시점의 적절한 선택에서 온 것이다.

   이 작품은 젊은 미망인과 남편의 옛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실제 선이 굵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통해 오고가는 무언의 애정 심리가 천진난만한 ‘나’의 눈을 통해 신선하게 드러난다. 남편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애정과 사랑손님으로 하여 흔들리는 마음, 사랑에의 동경과 봉건적인 애정 윤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나’의 눈을 통해 여과(濾過)됨으로써 아름다운 서정성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랑손님과 어머니 사이의 애정 심리는 어머니의 심리적 추이로 보아 표출되기도 어렵고, 더구나 그것은 구체적 애정으로 실현될 수도 없다는 데 이 작품의 진실성과 비극성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이 작품은 <아내모네의 마담>과 함께 작가가 초기 신경향파 문학에서 벗어나 자연주의로 전환한 시기의 작품에 속한다. 여섯 살 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과부인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과의 미묘한 애정 심리를 동양적인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였다.

 작자의 기교는 자연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보인다. 이 소설의 특징은 어린이의 시점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설명일변도의 전개를 극복하고 장면화로 처리되어 감정의 통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옥희는 여섯 살 난 어린아이로 과부인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사랑방 손님은 죽은 아버지의 친구요, 외삼촌의 친구이기도 한데, 이 동네에 선생이 되어 왔다가 마침 옥희네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사랑손님과는 날이 갈수록 서로 마음이 끌리는 눈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나 사랑손님은 각자의 위치 때문에 마음을 숨기고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헤어져 버리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정황이 물정 모르는 아이의 시선을 통해 전해짐으로써 독자들은 보다 새로운 각도에서 두 사람의 연애의 감정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묘사를 통해 이야기를 꾸미는 주요섭의 이런 작풍은 <아내모네의 마담>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데, 초기 <인력거꾼>과 같은 사회 고발의 작품과는 아주 대조적인 작품 세계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옥희라는 어린 소녀가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라면 시정(市井)에 널려 있는 흔한 이야기일 수 있으며, 또 말하기에 따라서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가 아니면 부도덕한 사랑의 갈등인가 하는 것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점을 말해 주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이 작품이 문학에 관해서 알려 주는 바는 ‘무엇’이라는 내용 못지않게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것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편, ‘어머니’는 분명 사랑의 감정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으면서도 이를 견디고 참는 다소곳한 여인상을 보여 준다. 이러한 행위가 하나의 형상으로 제시됨으로써 상징성을 띠게 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하나의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말지만, 작품으로 형상화됨으로써 이런 행동 방식이 우리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주요섭의 대표작은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알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 못지않게 알려져 잇는 것이 <아네모네의 마담>(1936)이기도 하거니와, 이상 두 작품은 실상 같은 계열에 속한다. 이 두 작품이 1930년대 한국소설에 자리를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문학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도시문명 속의 하나의 감각적 측면의 수용과 관련이 잇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문명이란 사실은 19세기적인 예술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식민지 속이기는 하나, 1930년대의 서울은 그 나름대로 다방도 있었고, 거기에는 음악도, 여인도, 술도, 그리고 예술도 있었다. <아네모네의 마담>은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미담과 미완성 교향곡, 그리고 만또를 두른 창백한 대학생이 모여드는 이 조그만 안식처의 감각적 처리를 소설이 감당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설이 세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련성은 이상(李箱)에서 보여주는 도시의 파멸적 요소와는 매우 다른 것이기도 하다. <아네모네의 마담>보다 더욱 산뜻한 작품이 <사랑손님과 어머니>이다.

   예배당과 유치원과 학교가 있는 어느 조그만 도시가 배경이며, 여섯 살 된 계집아이이며 유치원에 다니는 옥희가 이 작품의 1인칭 관찰자이다. 그리고 결혼 1년만에 남편을 사별하고 그 딸 옥희와 함께 친정집 옆에서 살아가는 젊고 예쁜 과부인 어머니와 옥희 아버지의 옛 친구인 화가이며, 이 마을 학교 교사인 손님이 등장한다.

   학교 교사였던 남편이 죽자 그 유복자(遺腹子)인 옥희라는 딸을 낳아 기르는 젏ㅁ은 과부집에 남편의 옛 친구가 그 집 사랑방에 하숙을 하게 된다. 이 남편 친구와 과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아무런 줄거리나 사건이 없이도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한국 소설사에서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기억될 것이다.

   그 하나는, 소설이 감당하는 정서의 세련성이다. 한국 소설은 너무 사명감에 젖어 소설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계몽의 수단 또는 계급투쟁, 민족 운동의 방편으로 생각해 왔다. 물론 그러한 사명감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 중의 하나가 이효석의 <돈(豚)>에서의 성(섹스)이었고, 혹은 김유정에서 보듯 토속적인 유머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감각이나 정서의 세련성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하나는 소위 관찰자 화자 시점(觀察者話者視點)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소설이 하나의 예술로 치부되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에 서서 사태를 포착하느냐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서설에서 가능한 시점은 대체로 네 가지이다. 그 하나가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시도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부수적 인물이 주동적 인물의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3인칭으로도 1인칭으로도 할 수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옥희라는 소녀를 1인칭으로 하고 있다. 남녀의 미묘한 감정을 어린애의 눈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보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작가의 역량이자 한국 소설의 한 봉우리가 되게 한 요인이다. - 김윤식 : <한국 현대문학 명작사전>(1982) -

   1935년에 [조광]지에 발표된 단편 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여섯 살 난 계집아이의 눈에 비친 애달픈 사랑 이야기다. 물론 꾸며진 이야기겠지만, 1930년대 당시에 어디선가 있음직한 이야기다. 아니,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머니, 옥희, 사랑방에 하숙하는 아저씨, 작은외삼촌 등이다. 이 작품은 옥희가 말하듯 쓰여 있다. 바로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 친구 사이를 오가며 ‘사랑의 우체부’ 노릇도 하고, 순수한 눈으로 ‘사랑의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이 소설 속의 옥희는 주인공이 아니라 관찰자이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가일까? 그건 더욱 아니다. 옥희라는 여섯 살 난 여자애와 주요섭이란 소설가는 다른 인물이다.

   아무튼 이 소설의 내용은 남편을 잃고 딸과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 여인과 그 남편의 친구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인습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애달픈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아이의 눈에 비치는 대로 전개되면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욱 애틋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만약에 어머니가 화자(話者)가 된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어머니가 화자가 된다면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 어머니는 자기가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데 죄의식을 갖고 있다. 아저씨가 화자가 된다 해도 감정을 직접 드러내긴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시점(視點)을 어떻게 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도 달라진다. 지은이는 어머니와 아저씨의 사랑을 아름답게 느끼고 있다. 비록 주위의 시선과 도덕관념 때문에 헤어지긴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불결하게 보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장 그런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옥희를 화자로 만드는 거였다. 옥희가 화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두 주인공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 편지 내용은 어떤 건지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점이 이 작품을 더 순수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옥희는 화자의 역할뿐 아니라 두 사람의 감정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도 하고 있다. 아저씨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는 걸 어머니에게 전한 것도 옥희였다. 이 말을 듣고 어머니는 아저씨 밥상에 삶은 달걀을 놓게 되고, 이 삶은 달걀은 두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첫 번째 소재가 된다. 아저씨가 떠난 뒤 맨 마지막 부분에,

   “이제는 달걀 먹는 이가 없어요”.

라는 어머니의 말을 보아도 그렇다. 아저씨가 옥희를 안고 어머니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것도 옥희를 귀여워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옥희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라든가, “이 꽃 아저씨가 엄마 갖다 주라고 줬어”라는 이야기로 두 사람의 마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옥희의 눈을 통해 한 단계 걸러진 두 사람의 마음을 보게 된다. 직접 두 사람의 사랑을 보는 것도 아니고, 오고 간 편지 사연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른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1930년대 한국 소설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로서, 단순히 사랑의 좌절을 그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연정(戀情)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사랑의 좌절이 윤리적 도덕관념에서 오는 데도 불구하고 끝내 윤리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오는 애틋함이 한층 감동을 더해 주고 있다. 우리 다시 한 번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펼쳐 보자. 옥희의 이야기 뒤에 감추어진 어머니와 아저씨의 마음을 읽어보자. 여러 가지 이유로 차마 드러내지 못했어도, 이어지지 못했던 애달픈 사랑이 거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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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손님과 어머니’】

   사랑방 손님과 안방 과부 사이의 미묘한 애정을 어린딸의 눈을 통해 영상화한 1961년작 한국 영화. 신필름 작품이다. 감독 신상옥(申相玉), 주요섭(朱耀燮) 원작의 소설을 임희재(任熙宰)가 각색하였다. 김진규(金振奎)ㆍ최은희(崔銀姬)ㆍ한은진(韓銀珍)이 출연하였고, 아역을 전영선(全映旋)이 맡았다.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영화화한 것으로, 1960년대 문예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가 특별히 주목받은 것은 단조로운 스토리 텔링 대신 특정한 상황과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묘사하는 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은 그때까지의 일반적인 한국영화들에 비해서는 대단히 독특하고 이례적인 것이었다.

   제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ㆍ시나리오상 등을 수상했으며,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