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성경 - naneun nugu-inga seong-gyeong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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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4 윤영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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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7~38

나는 누구인가

(막 8.27-38) 나는 누구인가 (20210214)

  1.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라는 고사성어를 아시지요? 이 이야기는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거처를 세 번 옮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집 근처에 묘지가 있었는데, 맹자가 장사지내는 것을 흉내내면서 놀자 맹자의 어머니는, 묘지 근처에서 지내는 것이 아들 교육에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물건을 팔며 장사하는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또 다시 이사를 결심합니다. 세 번째 머무른 곳이 서당 근처였는데, 맹자가 글 읽는 것을 흉내내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거기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로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곤 합니다. 그리고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적 환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적절하게 옮겨갔다고 이야기되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어느 교수(가톨릭대 인간학 김경집)의 말[1]처럼, 맹모는 '슬기롭되 덜 떨어진' 사람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교육이 그렇게 중요했다면, 묘지나 시장으로 가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처음부터 잘 판단하여 교육적으로 최적화된 곳을 찾아가야 슬기롭다 말할 수 있을 법 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으로, 오늘날 교육1번가라고 하는 곳(강남)은 일반적인 중산층의 사람들은 가볼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결국 맹모삼천지교도, 오늘의 시대에서는, 가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맹모삼천지교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2] 맹자의 어머니가 환경에 따라 (교육적 효과를 보면서) 이리저리 수동적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러한 곳들을 거처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묘지 근처로 데려가 키운 것은 맹자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시장 근처로 데리고 간 것은 인간의 생존(삶)의 현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비로소 교육 현장으로 가서 무엇을 배우고, 왜 배워야 하는지를 가르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기존의 해석대로라면 늘 환경과 여건을 고려하면서 어떻게든 좋은 환경에 이르러야 하지만,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 (그곳이 어디든) 모든 곳에 배움이 있고, 환경보다는 그 사람의 존재가 더 중요해집니다.

지금 우리 가정이, 우리 부부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남편 때문이고 아내 때문이고, 부모 때문이고, 자녀 때문이고, 그래서 서로 상대가 바뀌어야 하고, '환경이 바뀌어야 해! 여건이 바뀌어야 해! 경제적인 조건이 바뀌어야 해!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어!' 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우리 인식이 바뀔 수 있어요. 환경 때문도 아니고,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배우고 경험해가는 거예요. '나의 이런 말 한 마디가 가족을 아프게 하는구나! 내가 좀 참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니까 저 사람도 노력하는구나! 아~ 내가 이렇게 말 할 때 가족이 행복하고 웃음이 넘쳐나는구나!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니까 서로 화목해질 수 있구나!' 이렇게 배우는 과정입니다. 숱한 실수와 실패, 혹은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숙해져가고, 행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 가정은 더 나은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고 희망해볼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코로나의 상황도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좀 힘들었지만, 이제부터는 더 나은 창조세계를 꿈꾸어 볼 수 있는 거예요.

부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지금의 과정에서의 배움을 통해, 복된 길을 (행복의 길을, 화목의 길을)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베드로의 고백

오늘 말씀에 보면, 마가 역시 일종의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르렀던 장소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일행은 이스라엘 최북단, 헤르몬산 아래 위치한 빌립보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이 마을로 간 이유가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마을의 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이스라엘의 분봉왕인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로마식 건축물들로 재건축한 계획 도시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가 디베료 가이사[3](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였는데, 로마황제(2대)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 빌립을 추가해서, 빌립 가이사,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4]

여기에는 로마의 신들을 모시기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로마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활용될 극장이 들어섰습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순된 공간이었습니다. 고급 건축물들, 화려한 문화와 과학적으로 앞선 문명들이 이곳을 통해 이스라엘 내부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한 눈에 반할만할 매력적인 유혹이 가득했던 도시였습니다. 이곳을 경험한 사람들은 앞선 문명을 가진 로마와 로마의 황제를 우러러보게 할 만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곳에 이르러서, 그곳에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어떤 이들은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기도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자, 질문은 이내 제자들을 향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에게서 소문으로 알려진 예수가 아니라, 그동안 나와 함께 지내며 보고, 듣고, 경험했던 예수, 너희가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전해들은 예수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경험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한 청년에게 물어봤어요. 모태신앙으로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물어봤어요.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 청년은 많은 대답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온 예수님에 관해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그래서 제가 재차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를 통해 알게 된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예수님 말고, 당신이 알고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주님 앞에 서 보지 못한 사람, 예수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격이 급한 시몬 베드로는 정적을 깨고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막 8:29) 베드로의 이 대답은 예수에 관한 가장 모범적인 대답, 정답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이 고백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고백을 했던 장소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베드로의 이 대답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고백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도시 아닙니까? 로마 문화가 지배하는 도시, 로마인들이 숭상하는 신상들이 도처에 깔린 우상 숭배의 도시, 세상의 지배자, 세상의 구원자, 신적 지위를 얻은 이가 로마 황제라고 고백하는 그 도시에서, 예수가 바로 구원자이며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혁명적인 의미를 담은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더 무서운 것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돈과 정치, 부와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 아닙니까?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 그러나 돈이 없으면 결코 올라 설 수 없는 약극화의 시대. 돈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돈을 낳는, 그래서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새 돈과 권력에 예속된 채 살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부와 권력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풍조가 있다는 겁니다.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 그래서 물질의 풍요는 누리지만, 영적 빈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과 문화 속에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 여전히 살아 역사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분이 주님이라고 진실로 믿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진실로 하나님의 존재, 예수의 존재를 믿고 계십니까?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만큼 잘못된 시대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래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한 세상,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세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어가라고 우리를 모으셨고, 매주 예배를 드리며 그런 세상을 꿈꾸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지금도 도처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를 온전히 믿지 못한 채 자리만 지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믿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돈으로 바꾸려고 해선 안 됩니다. 내가 가진 힘과 권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본성은 언제나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될 때 언제든 내 속의 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그것을 사탄이라 표현하셨습니다.

  1. 가시나무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31절 말씀처럼, 때가 이른 줄 아시고 그 때부터 제자들에게 예수의 길이 어떤 길인지 밝히고 계십니다. (막 8:31)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이 불가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거부’ 였습니다. (막 8: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베드로 자신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이제 와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자신의 생각이 상충된다고 판단하고, 예수를 붙들고 뜯어 말리고,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항변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꾸짖고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예수를 거부하고 있을까요? 왜 예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막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막 8:33)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부하고, 늘 예수님과 함께 해왔지만, 아직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게 여러분과 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제 안의 사탄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올 때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목회자로 살아간다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의 연약함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자아가 죽어지지 못하고, 이기려고 하고, 여전히 이기심이 나를 지배하고, 여전히 미워하는 마음이 존재하고, 또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목사님도, 예수를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했지만, 여전히 가득한 죄의 모습, 더러운 마음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곡을 썼는데, 그 곡이 바로 ‘가시나무’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머물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하나님이 머물 곳이 없는가, 다음 가사에 나와 있습니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헛된 바램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바램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들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존재가 끼어들 틈도 없이 할퀴고 상처내는 무성한 가시나무 숲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베드로의 마음이고, 또 오늘 우리들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1.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물음 앞에 와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물음은, 내가 만난 예수님이 누구신가?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너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있지만, 정말 내가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원자로 믿고,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나의 구원이 주님께 달려 있음을 믿는 사람인가? 그래서 정말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예수님이 간절한 사람인가? 아니면 오늘 말씀의 베드로처럼,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상출될 때에는 예수님을 밀어내고 거부하는 사람은 아닌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자기를 완전히 비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 아닙니까? 과거 자기 중심적인 삶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훌륭한 고백을 하고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인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갈 2:20)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어야만, 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부활하십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지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낼 때 그는 부활한 예수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다시 한 번 주님을 깊이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으로, 죽음을 넘어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13052300912000241

[2]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7831

[3] 원래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 카아사르(BC100-BC44)의 이름으로 가문(성씨)의 이름이었다. 영어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 라고 하지만 모두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각국에서 다르게 발음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4] (눅3: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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