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선 의 국모 다 - naega joseon ui gugmo da

내가 조선 의 국모 다 - naega joseon ui gugmo da

(명성황후에서 리얼한 연기를 한 이미연)

여주에서 음서로 관직에 오른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중유의 5대손이었다.

참고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공신이나 전, 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채용하던 일을 음서라고 했다.

꽤 이름 있는 집안 덕분에 어렵지 않게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명이 짧았다. 딸아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민치록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자 민치록의 아내는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된다.

민치록의 딸아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친척 아주머니 민씨 부인이 특히나 어여삐 여겼고, 그 됨됨이를 보고 고종의 아내감으로 적극 추천했다.

민씨 부인은 바로 당시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였다.

그리하여 민치록의 딸은 고종과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이다.

왕실 외척들에 의해 조정이 좌우되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자 했던 대원군은 아비를 일찍 여의고 단출한 가계였던 명성황후를 일찍이 며느리로 점찍어 두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오판이었다. 명성황후는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적 세력을 키우고 왕보다도 더 주목을 받으며 존재 가치를 드러냈던 전무후무한 왕비로 성장한 것이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그려냈던 드라마 속 명대사 "내가 조선의 국모다"는 그녀가 실제로 한 말이라 볼 수는 없으나 추측건대 명성황후의 카리스마를 단적으로 드러낸 문장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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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국모다로 카리스마를 드러낸 명성황후 민씨)

그런데 오랜 세월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와 권력 싸움을 한 악녀로 오인되어 후궁을 칭할 때나 쓸법한 '민비'라는 호칭으로 알려졌다

고종이 모든 국정을 그녀와 의논할 만큼 정치적 판단력, 외교술, 시대적 감각이 모두 출중했던 명성황후는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자 했던 일본 입장에서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1895년 일본은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처참히 시해하고도 모자라 이후 그녀를 시아버지와 권력 싸움을 벌인 악녀로 둔갑시켰다.

이러한 영향으로 명성황후는 오랜 세월 황후에 걸맞지 않은 '민비'라는 호칭으로 불려야 했다.

1997년 그녀의 비통한 죽음만큼이나 기막힌 일이 이 땅에서 또다시 벌어졌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 황후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던 명성황후의 사진이 가짜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간 대한제국기를 다룬 상당수의 외국 서적에서 '조선의 왕비'로 소개되었던 그 사진은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라면 미국 잡지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4년 11월 호에 최초로 실렸다.

그런데 이 사진에는 '한국 왕비의 수석 상궁'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고 한다.

또한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언더우드 부인이 1905년에 저술한 <조선에서의 토미 톰킨스와 함께>에 이 사진이 '정장을 한 숙녀'로

표기되어 있고, 1906년 고종의 정치 고문이었던 헐버트 박사가 쓴 <대한민국 멸망사>에서도 이 사진을 '조선의 여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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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황후의 모습은 궁녀일 가능성이 높다.

논란 속에 199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국사 교과서 개정판에는 명성황후 사진이 시해 현장인 옥호루로 교체됐다.

30여 년간 명성황후를 연구해온 한 교수는 사진 속 인물의 복장을 지적했다.

대개 조선의 왕족은 흉배 속에 용이나 봉황 문양을 수놓아 그 신분을 나타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 황비의 자리를 이어받은 엄비의 사진에는 이러한 흉배의 모양이 또렷하다.

하지만 교과서에 실린 명성황후의 복식은 원삼에 어여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상궁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지밀상궁의 복식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들 가운데 당시 한성신보 기자였던 고바야카 히데오가 황후를 시해한 이야기를 수기 형식으로 썼는데,

그 책에 대원군의 진짜 사진과 함께 명성황후로 둔갑한 궁녀 사진을 실었다고 한다.

이처럼 명성황후의 모습을 조작한 이유는 그녀를 거듭 모욕하기 위해 벌인 흉계라는 것이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 일, 한 외교 사료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을 담은 사진첩에 문제의 사진이 궁녀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더욱 개탄할 것은 2001년 개정판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이 문제의 사진이 왜곡된 내용과 함께 실려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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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씨/ 이미연)

교과서에는 '일본은 조선 궁정 내의 대립을 이용하여 일본에 기대려고 하는 세력과 힘을 모아 청의 세력을 없애려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1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망명 시절에 발간한 <독립 정신>에 또 다른 명성황후의 사진이 등장한다.

1920년대에 역사학자 문일평 선생이 이 사진을 들고 황후의 상궁들을 찾아다니며 확인했지만 모두 그 사진은 황후가 아니라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러하자 일각에서는 명성황후의 사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문일평 선생의 저서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에 궁 안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소식

을 접한 고종은 많은 현상금을 걸고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해 몹시 애석해 했다'라는 대목이 있어 명성황후가 사진을 찍었음은 물

론 아내를 비명에 보내고 못내 그리워했던 고종의 심정까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 극렬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대인기피증과 노출 기피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때문에 가까운 친인척이 아니면 잘 만나지도 않고 초상화나 사진을 남기는 것 또한 꺼렸다고 하니 그녀의 사진 논란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다만 조선을 네 차레나 방문하고 명성황후를 실제 만났던 영국의 여류 지리학자 비숍은 명성황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칠흑 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중략)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중에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이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모두 불태웠기에 현재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들은 모두 반은 맞고 반은 틀릴 가능성을 가진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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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서 명성황후로 분장한 학생이 추모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구한말 외세의 침입이라는 얼룩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철의 여인으로, 비운의 황비로, 그리고 조선의 국모로 어지러운 삶을 살면서도 꿋꿋했던 명성황후.

어쩌면 그녀의 삶과 업적, 죽음에 얽힌 왜곡을 바로잡았을 때 잃어버렸던 진짜 명성황후의 얼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02) 오늘의 명언

"커다란 비결은 결코 낡지 않은 인간으로서 인생을 끝까지 사는 것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나는 삶을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를 항상 책에서 얻었다.'

-벨 혹스

"남의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보내라. 남이 고생한 것에 의해 쉽게 자기를 개선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참고 자료 / <네이버 검색>. <서프라이즈> mbc 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