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하나님 앞에 높고 낮음, 사소함과 중요함의 기준은 다르다 마가복음 9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5-02-06
말씀내용 9장. 하나님 앞에 높고 낮음, 사소함과 중요함의 기준은 다르다 (찬 212) 1.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는 말씀은 이어지는 변화산상의 영광을 가리킨다(1). 변화산상의 사건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고난 받을 것을 말씀 하신지 엿새 만에 일어난 일이다(2). 주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고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셨다. 구약 쉐키나의 영광을 세 제자는 볼 수 있었고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는데, 이 두 구약의 인물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전체를 대표한다. 제자들은 그 광경 앞에서 너무나 두려웠지만(6) 베드로는 주님과 모세,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고 그 영광 가운데 머물고자 주님께 아뢴다(5). 이 사건 후, 주님은 부활 때까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세 제자에게 당부하셨다(9). 주님께서 이전에는 시간적 제약을 두고 말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었는데, 이것은 말해야만 할 때(부활)가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영광을 세 제자에게 보여주셨다. 메시아에 대한 엉뚱한 기대는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할 때까지는 완전히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들이 이 사건을 해석할 수 있고 또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세 제자는 주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시자,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여 의논하다가(10)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말의 의미를 주님께 여쭌다(11). 그들에게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있었으며 변화산에서 본 엘리야의 모습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대하지 않았다고 하심으로써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었음을 시사하신다(12~13). 3. 산에서 내려와 남은 제자들에게 이르자 서기관들과 제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귀신 쫓는 권한과 자격이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었을 것이다(14,16). 그때 주님께 한 사람이 와서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제자들이 능히 고치지 못했다고 하며 고쳐주시길 구했다(17~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져 가는지라......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라는 아버지의 보고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영육으로 파괴하는 사탄의 역사를 보여준다(18,22).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19), '할 수 있거든'이란 아버지의 말의 불신앙도 책망하신다(23). 주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시자, 그 아버지는 '곧' 돌이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는다(24). 주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후, 제자들은 자신들은 왜 할 수 없었는지를 묻자(28), 주님은 '기도 외에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답하신다(29). 이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나오는 능력에 관해서도 무지하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통해서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 자기들의 과거의 성공과 능력에(6장) 의존하여 귀신을 쫓으려고 했을 것이다. 은사나 능력은 자기 안에 내재하는 불변하는 능력이 아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을(6:7) 임의로 조작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유혹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신뢰하는 태도다. 과거에 행한 것이 현재의 보장이 되지 않는다. 기도가 능력의 통로라고 할 때 우리는 기도가 가지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존을 기도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4.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였다(30~32). 이것은 그들이 메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가 주님의 말씀에 의해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자들이 길에서 자기들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유치한 논쟁을 벌인 것은 그들이 깨닫지 못했음을 보여준다(33~34).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끝에 있는 자이며 섬기는 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생각을 뒤엎으신다(35).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중요한 원리를 가르치신다(36). "나를 영접하면 그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보냄 받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이점에서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의 문제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작고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크고 중요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5.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본 요한은 그가 자기들과 한 무리가 아니므로 금하였다고 보고한다(38).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서 자신들이 가지는 특권의식이 도전 받는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주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와 한편이니 금하지 말라고 하신다(39~40).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이유로(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물 한 그릇을 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상주실 일"이라는 것이다(41). 반대로 주를 믿는 작은 자를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이 아니며 지옥에 던져질 만한 죄다(42~43). 이렇게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49). 이는 구약 제사에서 제물을 소금과 함께 드린 것에서 나온 말일텐데(레 2:13; 겔 43:24; 출 30:35), 제물을 제물 되게 하고 세상을 살리는 소금은 제자들의 본질적 표지이며 제자됨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한다는 것은 시련과 희생이 제자들에게 주어져 그들을 정화시키며 견고하게 해줄 것을 의미한다. 사도 베드로가 불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벧전 4:12). 본질의 상실은 제자됨의 정체성을 잃게 한다. 주님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신다(50). 높고 낮음의 경쟁의식으로 인한 갈등이나 자기들이 모르는 자라고 해서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특권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소금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행위다. 주님과 복음에 대한 공동의 헌신을 기억하고 종의 소명을 인정한다면 그런 갈등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6. 크고 작음, 높고 낮음, 중요하고 사소함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다. 육신적 인식은 서로 다투게 할 뿐이다. 세상에서 받는 모든 평가는 주님의 평가와는 크게 다를 것이다. 자기 자리, 자기 몫을 믿음으로 감당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일은 자기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것은 언제나 기도를 통해서 표현된다. 7. "하나님 아버지, 저희 삶이 작고 사소해 보인다고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작은 일도 잘 감당하여 마지막 날에 주님이 알아주시는 삶을 살도록 믿음을 주시옵소서.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게 하옵소서."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아멘 레고 휘민 호티 에이신 티네스 호데 톤 헤스테코톤 호이티네스 우 메 규손타이 다나투 헤오스 안 이도신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엘렐뤼뒤이안 엔 뒤나메이 개역개정,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성 경: [막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걸하다. 카이 메타 헤메라스 헼스 파랄람바네이 호 예수스 톤 페트론 카이 톤 야코본 카이 톤 요안넨 카이 아나페레이 아우투스 에이스 오로스 휲셀론 캍 이디안 모누스 카이 메테모르포데 엠프로스덴 아우톤 개역개정,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카이 타 히마티아 아우투 에게네토 스틸본타 류카 리안 호스 키온 호이아 그나퓨스 에피 테스 게스 우 뒤나타이 류카나이 개역개정,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그 옷이 광채가...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카이 옾데 아우토이스 엘리아스 쉰 모세이 카이 에산 쉴랄룬테스 토 예수 개역개정,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페트로스 레게이 토 예수 랍비 칼론 에스틴 헤마스 호데 에이나이 카이 포이에소멘 트레이스 스케나스 소이 미안 카이 모위세이 미안 카이 엘리아 미안 개역개정,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성 경: [막9:5]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응답하다’의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우 가르 에데이 티 랄레세 헤산 가르 에크포보이 개역개정,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카이 에게네토 네펠레 에피스키아주사 아우토이스 카이 엘덴 포네 에크 테스 네펠레스 렐루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아우투 아쿠에테 개역개정,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몰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카이 엨사피나 페리블렢사메노이 우케티 우데나 에이돈 알라 톤 예순 모논 멛 헤아우톤 개역개정,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카이 카타바이논톤 아우톤 에크 투 오루스 디에스테일라토 아우토이스 히나 메데니 하 에이돈 디에게손타이 에이 메 호탄 호 위오스 투 안드로푸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 개역개정,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카이 톤 로곤 에크라테산 프로스 헤아우투스 쉬제툰테스 티 에스틴 토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나이 개역개정,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카이 에페로톤 아우톤 레곤테스 호티 레구신 호이 그람마테이스 호티 엘리안 데이 엘데인 프로톤 개역개정,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호 데 에페 아우토이스 엘리아스 멘 엔돈 프로톤 아포카디스타네이 판타 카이 포스 게그랖타이 에피 톤 휘온 투 안드로푸 히나 폴라 파데 카이 엨수데네데 개역개정,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성 경: [막9:12]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알라 레고 휘민 호티 카이 엘리아스 엘렐뤼덴 카이 에포이에산 아우토 호사 에델레산 카도스 게그랖타이 엪 아우톤 개역개정,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성 경: [막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말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카이 엘돈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에이돈 오클론 폴륀 페리 아우투스 카이 그람마테이스 쉬제툰타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성 경: [막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 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카이 유데오스 파스 호 오클로스 이돈 아우톤 엨세담베데 카이 프로스트레콘테스 에스파존토 아우톤 개역개정,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카이 에페로테센 투스 그람마테이스 티 쉬제테이테 프로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헤이스 에크 투 오클루 에이펜 디다스칼레 에넹카 톤 휘온 무 프로스 세 에콘타 프뉴마 알랄론 개역개정,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 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카이 호푸 에안 아우톤 카탈라베 레쎄이 아우톤 카이 아프리제이 트리제이 투스 오돈타스 카이 크라이네타이 카이 에이파 토이스 마데타이스 수 히나 아우토 에크발로신 카이 우크 이스퀴산 개역개정,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성 경: [막9:18] 귀신이 어디서 든지...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란 ‘부셔버리다’, ‘소리지르다’,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아우토 레게이 호 게네아 아피스토스 헤오스 포테 프로스 휘마스 에소마이 헤오스 포테 아넼소마이 휘몬 페레테 아우톤 프로스 메 개역개정,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성 경: [막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 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란 ‘족속’ ‘자손’,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카이 에넹칸 아우톤 프로스 아우톤 카이 이돈 아우톤 유데오스 토 프뉴마 에스파랔센 아우톤 카이 페손 에피 테스 게스 에퀼리에토 아프리존 개역개정,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성 경: [막9:20] 귀신이 예수를 보고...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카이 에페로테센 톤 파테라 아우투 포소스 크로노스 에스틴 호스 투토 게고넨 아우토 호 데 에이펜 파이디오덴 개역개정,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성 경: [막9:21] 언제부터...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카이 폴라키스 아우톤 카이 에이스 퓌르 에발렌 카이 에이스 휘다타 히나 아폴레세 아우톤 알 에이 티 뒤나사이 보에데손 헤민 스플랑크니스데이스 엪 헤마스 개역개정,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성 경: [막9:22] 귀신이 죽이려고...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호 데 예수스 에이펜 아우토 토 에이 뒤나사이 피스튜사이 판타 뒤나타 토 피스튜온티 개역개정,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성 경: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카이 유데오스 크랔사스 호 파테르 투 파이디우 메타 다크뤼온 엘레겐 피스튜오 퀴리에 보에데이 무 테 아피스티아 개역개정,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성 경: [막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이돈 데 호 예수스 호티 에피쉰트레케이 오클로스 에페티메센 토 프뉴마티 토 아카다르토 레곤 아우토 토 알랄론 카이 코폰 프뉴마 에고 에피타쏘 소이 엨셀데 엨스 아우투 카이 메케티 에이셀데스 에이스 아우톤 개역개정,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성 경: [막9:25]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카이 크랔산 카이 폴라 스파랔산 아우톤 엨셀덴 카이 에게네토 호세이 네크로스 호스테 폴루스 레게인 호티 아페다넨 개역개정,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성 경: [막9:26] 귀신이...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귀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호 데 예수스 크라테사스 아우톤 테스 케이로스 에게이렌 아우톤 카이 아네스테 개역개정,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성 경: [막9:27]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카이 에이셀돈타 아우톤 에이스 오이콘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에페로톤 아우톤 캍 이디안 호티 헤메이스 우크 에뒤네데멘 에크발레인 아우토 개역개정,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성 경: [막9:28]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투토 토 게노스 엔 우데니 뒤나타이 엨셀데인 에이 메 엔 프로슈케 카이 네스테이아 개역개정,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성 경: [막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카이 에케이덴 엨셀돈테스 파레포류온토 디아 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우크 에델렌 히나 티스 그노 개역개정,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성 경: [막9: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에디다스켄 가르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호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파라디도타이 에이스 케이라스 안드로폰 카이 아포크테누신 아우톤 카이 아포크탄데이스 메타 트레이스 헤메라스 아나스테세타이 개역개정,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성 경: [막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호이 데 에그노운 토 레마 카이 에포분토 아우톤 에페로테사이 개역개정,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성 경: [막9:32]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21등). 카이 엘덴 에이스 카페르나움 카이 엔 테 오이키아 게노메노스 에페로타 아우투스 티 엔 테 호도 프로스 헤아우투스 디엘로기제스데 개역개정,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성 경: [막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호이 데 에시오폰 프로스 알렐루스 가르 디엘레크데산 엔 테 호도 티스 메이존 개역개정,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성 경: [막9:34]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 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카이 카디사스 에포네센 투스 도데카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이 티스 델레이 프로토스 에이나이 에스타이 판톤 에스카토스 카이 판톤 디아코노스 개역개정,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성 경: [막9:35]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카이 라본 파이디온 에스테센 아우토 엔 메소 아우톤 카이 에낭칼리사메노스 아우토 에이펜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성 경: [막9: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스 안 헨 톤 토이우톤 파이디온 뎈세타이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에메 데케타이 카이 호스 안 에메 데케타이 우크 에메 데케타이 알라 톤 아포스테일란타 메 개역개정,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성 경: [막9:37]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에페 아우토 호 요안네스 디다스칼레 에이도멘 티나 엔 토 오노마티 수 에크발론타 다이모니아 카이 에콜뤼오멘 아우톤 호티 우크 에콜루데이 헤민 개역개정,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성 경: [막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호 데 예수스 에이펜 메 콜뤼에테 아우톤 우데이스 가르 에스틴 호스 포이에세이 뒤나민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카이 뒤네세타이 타퀴 카콜로게사이 메 개역개정,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성 경: [막9:39]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호스 가르 우크 에스틴 칻 휘몬 휘페르 휘몬 에스틴 개역개정,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성 경: [막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 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호스 가르 안 포티세 휘마스 포테리온 휘다토스 엔 토 오노마티 무 호티 크리스투 에스테 아멘 레고 휘민 후 메 아폴레세 톤 미스돈 아우투 개역개정,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성 경: [막9:41]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카이 호스 안 스칸달리세 헤나 톤 미크론 투톤 톤 피스튜온톤 에이스 에메 칼론 에스틴 아우토 말론 에이 페리케이타이 뮐로스 오니코스 페리 톤 트라켈론 아우투 카이 베블레타이 에이스 텐 달라싼 개역개정,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성 경: [막9:42]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카이 에안 스칸달리제 세 헤 케이르 수 아포콮손 아우텐 칼론 에스틴 세 퀼론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 에 타스 뒤오 케이라스 에콘타 아펠데인 에이스 텐 게엔난 에이스 토 퓌르 토 아스베스톤 개역개정,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 경: [막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과 ‘발’그리고 ‘눈’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발,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이라는 형용사‘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 된다. 물론 이’조엔‘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모스코,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 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 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개역개정,44 (없음) 카이 에안 호 푸스 수 스칸달리제 세 아포콮손 아우톤 칼론 에스틴 세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 코론 에 투스 뒤오 포다스 에콘타 블레데나이 에이스 텐 게엔난 개역개정,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역개정,46 (없음) 카이 에안 호 옾달모스 수 스칸달리제 세 에크발레 아우톤 칼론 세 에스틴 모높달몬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에 뒤오 옾달무스 에콘타 블레데나이 에이스 텐 게엔난 개역개정,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호푸 호 스콜렠스 아우톤 우 텔류타 카이 토 퓌르 우 스벤뉘타이 개역개정,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파스 가르 퓌리 할리스데세타이 카이 파사 뒤시아 할리 할리스데세타이 개역개정,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칼론 토 할라스 에안 데 토 할라스 아날론 게네타이 엔 티니 아우토 아르튀세테 에케테 엔 헤아우토이스 할라스 카이 에이레뉴에테 엔 알렐로이스 개역개정,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성 경: [막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