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임진왜란 - dokugawa ieyaseu imjin-waelan

1. 히데요시 의 조선정벌에 비관적이였던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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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밀랍인형, 정말 사실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급무사에서, 일본을 통일한 영웅이 된 후,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하며 “조선 정벌”을 일으킨다.(자신을 태양의 아들 이라고 까지 칭함)

그러나, 당시 “히데요시”의 세력에 밀려 에도로 쫓겨나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많은 수의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조선과 명의 정벌 계획"에 부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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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하다못해, 정벌군을 이끌던 “가등청정” 역시 “임진왜란”을 막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결국 일어나게 되었고, 당시 히데요시 다음의, “일본 최대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임진왜란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받는다.

2. "히데요시"의 압박에 “예비대” 역할로만 참여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임진왜란 - dokugawa ieyaseu imjin-wa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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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

에 “도쿠가와”는 관동 일대(지금의 일본의 동경 북동쪽)의 반란 진압 및, 관동 경영을 핑계로 “관동 다이묘”들을 비롯한, 자기 세력의 참전 규모를 최소화 한다.

그리고 일부만 전진기지인 지금의, “사가현 가라쓰시 히젠나고야성”에 주둔시켜서 예비대의 역할을 하는 선에서 개입을 최소화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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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건설한 "에도성" (아쉽게 천수각은 불에 타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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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성" 3D 복원도

데요시 는 당연히 “이에야스”의 지원이 절실했지만, “이에야스의 세력”이 상당해서, 괜실히 강요할 경우, 조선출병 동안 반란마저 일어날 수 있었기에, 결국 “이에야스”의 조선 출병에 대한 강요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출전을 거부하자, “이에야스”를 조선으로 파견하려는 시도를 구상하지만, 이것도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3. 임진왜란 후 그렇게 염원하던 “천하인”이 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임진왜란 - dokugawa ieyaseu imjin-wa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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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하가라 전투 후, 천하인이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에야스의 예상처럼, 실패로 돌아가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그 후 내전에서 “이에야스”가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파를 제압하고, “천하인”이 되어 쇼군에 오르면서 완전히 마무리 된다.

4. 조선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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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이 완전히 마무리 된다는 의미는, 일단 “이에야스”가 조선 정부와 국서를 교환하여, 명확하게 “조일간의 전쟁”을 끝냈다는 의미이다.

국서의 전달과정에서 “쓰시마 도주”의 국서위조, 중종의 능을 파헤친 범인에 대한 조선송환 요구에 대해 “엉뚱한 자”를 보낸 점, “중종의 시신”이라고 보낸 시체가 가짜인 점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아무튼 “도쿠가와”는 최선을 다해 사죄를 하였고, 일단 “조일 간”에 전쟁의 재발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는 “도쿠가와 막부”를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광해군일기를 보면 조선 조정이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받아 본 명나라 유격의 답신이 이랬다.

"자문을 받아보고 왜인들의 정세를 알았습니다. 적국에 일이 있는 것이 비록 귀국에 다행이기는 하나 덕천가강은 꾀를 써서 강자를 제어하는 일을 잘하니, 뜻을 얻은 뒤에는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광해군 8년(1616년) 5월 20일

이는 명나라 역시 히데요시 이후 집권한 이에야스 도 경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5. 조선의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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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황금갑옷

무튼, 조선에서는 “전쟁의 원흉” 이었던 “히데요시” 보다는, “이에야스”에 대해 훨씬 좋은평가를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에야스”에 대해서 이렇다 할 악평은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기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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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

■ 강항의 “간양록”을 보면 “이에야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 "괴팍스러운 성품에다가 싸움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국을 통틀어 그와 자웅을 견줄 자가 없었다."

2)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고 얼굴이나 몸집도 두툼하게 생겨 덕스러운 편이다.“

3) "수길(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는 많은 인심을 얻었지만 수길의 뒤를 갈음하게 되자 도리어 일반의 신망이 떨어져 갔다.“

4) "하는 짓이 명랑하지 못하고 컴컴하다. 한 번 비위에 거슬리면 그 사람을 죽을 고비에 몰아넣고 만다. 그렇기에 부하들도 코앞에서만 슬슬 기지 한 놈도 믿고 따르는 놈이 없다고 한다."

" 간양록"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아무튼, “간양록”에서 묘사된 것을 보면, “이에야스”는 상당히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인물이면서, 말수가 적고 침착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